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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박물관’ 충정로 일대를 걷다 만나는 맛집

미동아파트 곁 <오리와메밀푸른초장>ㆍ북아현동 <솜씨방>

[유성호의 맛있는 동네 산책] 충정로는 충정로 사거리에서 경기대 입구 교차로까지 길이 800m 짤막한 도로다. 지하철로 따지면 5호선 서대문역에서부터 충정로역까지 한 정거장이다. 이 길의 원래 이름은 죽첨로(竹添路)였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로 와 있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성을 따서 부르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충정로란 이름을 붙였다.                  

                                        

충정(忠正)은 조선 말기의 충신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공에서 따왔다. 원래는 경향신문(옛 문화방송국)에서 서대문로터리를 지나 아현삼거리까지 길이 1.5㎞의 길이었다. 지금은 줄어든 700m를 신촌로가 이어가고 있다. 


이 길은 예부터 의주로를 지나 중국이나 마포, 양화진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도로 주변에는 서대문경찰서, 충정로우체국, 서울시종합건설본부, 서부수도사업소, KT&G, 프랑스대사관 등 공공기관과 인창중고등학교, 경기대학교(서울캠퍼스), 미동초등학교 등 교육기관,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종근당빌딩, 풍산그룹 사옥 등 대형빌딩이 있다. 


이 지역은 무엇보다 우리나라 아파트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충정아파트, 식산은행 독신자아파트 자리에 지은 재건축 1호 미동아파트, 당시 최신 공법을 적용한 개명아파트(현 충정로 현대아파트)와 인근 서대문아파트 등 근현대에 지어진 아파트가 아직까지 남아있거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아파트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 증인이자 최초 아파트 ‘충정아파트’

▲ 1962년 8월 충정아파트 모습과 현재 모습. [사진=동아일보(1962.8.21자),

                                                                                                                                                                      

충정아파트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한 기사가 1979년 2월 3일 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기사 제목은 ‘한국 첫 아파트 가 헐린다’로 달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0년 건립 때부터 이 아파트는 우리민족사의 시련과 직결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일본인 도요타 씨가 이 건물을 지어 ‘도요다아파트’라 명명했다가 호텔로 업종을 바꿨는데, 손님이 들지 않아 적자에 허덕였고 나중에 소유권이 동아기업으로 넘어갔다. 해방이 되자 만주 등지서 귀국한 동포들이 아파트를 점거했고 6.25 동란이 나자 북괴군들이 점령, 지하실에서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수복 후에는 미군이 인수, ‘트레머호텔’이라 이름 짓고 유엔군 전용호텔로 사용했다. 5.16 혁명 후인 1962년 3월 정부는 여섯 아들을 모두 6.25동란에 바쳤다는 김병조 씨의 소식을 전해 듣고 김 씨를 ‘반공의 아버지’라며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고 당시 시가 5천만 원에 이 건물을 넘겨줬다. 
김 씨는 정부의 협조를 얻어 5층에 가건물을 짓는 등 보수공사를 마치고 ‘코리아호텔’이란 간판까지 내걸었으나 불과 다섯 달 후인 8월, 6.25 때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이 전혀 터무니없는 허위 날조임이 밝혀져 김 씨는 치안국에 구속됐고 사세청(현 국세청)은 호텔을 다시 몰수했다. 
그 후 이 건물은 내과병원을 경영하던 장동현 씨(현재 미국거주)에게 3천8백만 원에 임대차 계약이 성립된 후 장 씨의 부인 최이순 씨 명의로 돼 있다가 관리 부실로 유인옥 씨 손으로 넘어갔고, 75년 다시 서울은행의 소유가 됐다. 유 씨는 이 건물을 은행에 저당 잡히기 전 입주자들에게 미리 분양을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치위원회를 결성, 은행 측과 협상을 벌여 76년 1억 4천만 원에 5년 상환으로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잔금을 불입하던 중 건물의 일부가 헐리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웬만하면 아예 부서 버리고 새 건물을 지을 수도 있었으나 52가구가 들어있고 은행과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지 않는 등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힌 문제 때문에 도시계획에 걸린 19가구 2백70평 정도만 헐리게 된 것이다. 철거 보상을 둘러싸고 입주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려 뚜렷한 대책도 못 세우고 엉성한 뼈대를 드러낸 채 시일이 지나고 있는 실정이다.’


기사만 봐도 우여곡절이 많은 아파트다. 충정아파트의 준공연도는 관공서 문서나 문헌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한 준공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문 등의 자료를 통해 준공연도를 가늠해 보면 1930년이 많다. 건축물대장에는 1937년 8월 29일로 등록돼 있는 데 당시 관행으로 역산하면 1930년 초반에 건설됐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한국전쟁 당시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 

    

▲ 한국전쟁 당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아현동 일대를 미국인 종군기자인 맥스 데스퍼가 담았다. 사진 중앙 뒤쪽으로 멀리 충정아파트가 보인다(사진 왼쪽 붉은 점선 안). 

충정아파트의 최초 이름은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豊田種雄)가 설계한 데서 그의 이름을 따 도요타아파트 혹은 우리말로 풍전아파트라고도 불렀다. 대동강철교 피난민 사진으로 퓰리처상(1951년)을 받은 미국인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가 찍은 사진에도 충정아파트가 등장한다. 충정로는 한국전쟁 당시 시가전이 치열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용케 온전하게 살아남은 건물이다. 맥스 데스퍼는 한국전쟁이 상징과도 같은 폭파된 대동강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사진(오른쪽)으로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휴전이 되면서 미군정에 수용돼 유엔군이 머무는 ‘트레머호텔’(Traymore Hotel)로 용도를 달리했다가 ‘코리아관광호텔’을 거쳐 이후 70년대 유림아파트, 또다시 충정아파트로 이름이 바뀌었다. 평탄치 않은 90년 세월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충정아파트는 오랜 시간 동안 증축과 일부 철거, 업종에 따른 개축 등을 거치면서 기존 아파트 모습이 많이 훼손됐다. 그래도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 형식의 주거 건축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식민의 역사터에 자리 잡은 미동아파트    


▲식산은행 독신자아파트와 그 터 위에 지어진 미동아파트(상단좌우)와 개명아파트와 충정로 현대아파트(하단 좌우). 

충정아파트 건너편에서 서대문사거리 방향으로 200m쯤 내려가면 도로 안쪽에 숨어 있는 한 동짜리 미동아파트가 보인다. 이 자리는 원래 일제 때인 1940년에 지은 식산은행 독신자아파트가 있던 곳이다.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일자형 주동으로 총 42호가 거주했다. 1969년 미동아파트로 재건축해서 입주를 시작했다.    

        

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 산업정책을 금융으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이다. 한마디로 금융으로 식민지 자본을 수탈하는 전초 기관이었다. 1918년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해 설립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한국식산은행으로 이름을 바꿨고 1954년에 한국산업은행에 합병됐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이어진 지속적인 이농과 인구의 도시집중, 한국전쟁까지 겹치면서 주택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전쟁 후에는 자연적인 인구증가까지 맞물려 주택보급이 전후 복구사업의 핵심이었다. 주택보급 사업의 핵심은 대량공급인데, 아파트 건립 붐이 일어나게 된 주된 동기가 된다. 


1956년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지은 행촌아파트를 필두로 민간건설사인 중앙산업이 중앙아파트(현 주교동 중앙프라자), 종암아파트(현 종암SK아파트, 이상 1957), 개명아파트(1959) 등을 짓고 대한주택영단이 이를 인수해 민간에 분양했다. 미동아파트 건너편 지금의 현대아파트는 개명아파트가 있던 자리다.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 아파트 격인 종암아파트 낙성식에는 이승만 대통형이 참석해 수세식 화장실을 극찬했다고 한다. 실내에 화장실을 넣은 기술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어진 개명아파트는 중앙산업이 보유한 신기술을 모두 쏟아 넣은 ‘작품’이다. 건설 당시 KBS에서 인터뷰를 나왔을 정도였다. 건축방식, 건물 수명, 세대수, 단지 내 동선과 수도 사정 등 아파트 건축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주력했던 인터뷰였다. 이때 중앙산업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주택 파괴와 인구의 급격한 팽창 등으로 심각해진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이었다고 답했다. 개명아파트는 1990년 재건축 허가를 받은 최초 아파트로 기록된다.  


조금 떨어진 만초천 휘어진 물길을 복개해 지은 서소문아파트까지 이 일대는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담은 아파트가 많다. 그래서 필자는 이 동네를 ‘아파트박물관’이라고 이름 지었다. 공식적이진 않지만 우리나라 아파트 역사를 설명하기엔 충분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아파트가 모여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오리와 메밀요리 전문점 ‘오리와 메밀푸른초장’    

                              

▲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방오리백숙과 메밀전병, 물김치, 한상차림, 누룽지죽.


아파트 서너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출출해진다. 얼마 전 재개발이 확정된 북아현동 일대를 답사한 후 미동아파트 쪽으로 내려오다가 동행한 지인이 근처에 오리고기 요릿집을 한 곳 추천했다. 메밀국수와 오리를 함께 하는 <메밀과 오리 푸른초장>이란 음식점이다. 이 집은 수요미식회란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을 탔다. 수요미식회는 숨은 내공을 가진 식당을 소개하는데, 들여다보면 결국 ‘잘 만든’ 맛집 소개 프로그램이다. 


이 식당은 위치상으로 미동아파트와 닮아있다. 대로변이 아니라 두 번째 라인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판이 보이질 않아 초행길엔 찾기가 쉽진 않다. 게다가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어야 하기에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한번 알아두면 가끔 생각이 나는 ‘맛있는 식당’이다. 

                                                                                       

▲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생오리구이, 메밀전, 물막국수, 비빔막국수, 불판 위 오리구이.


이 집 메인은 오리 요리와 메밀국수와 전병 등 메밀요리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집의 메인보다 사이드 반찬을 더 높이 산다. 특히 넉넉하게 내 오는 물김치는 품격이 느껴지는 맛이다. 물김치에 메밀면 사리를 말아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생채, 무나물 무침, 갓김치, 배추김치, 깻잎과 고추장아찌, 상추겉절이 등 갈 때마다 한두 가지가 바뀌면서 찬모의 숙련된 손맛을 보여준다. 마치 자랑하듯 내놓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맛을 잘 잡았고 토속적인 맛을 느끼게 한다.


메인요리인 생오리구이, 한방오리백숙(누룽지죽) 모두 가성비가 좋은 곳이다. 식당에 갈 때마다 한방오리백숙을 시켜 놓고 여성 4명이 둘러앉아 먹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그만큼 여성들이 선호하는 메뉴다. 메밀막국수와 전병, 메밀전 등 메밀로 만든 음식도 이 식당의 주력이다. 낮 매출을 막국수가 담당한다면 밤은 오리가 책임지는 구조다. 겨울엔 막국수가 아무래도 주춤하다 보니 보완메뉴로 가성비 좋은 순두부를 판다.            


서울식 불고기가 생각나면 가는 곳 ‘솜씨방’       

▲ 황동불판에 육수가 자작한 솜씨방의 서울식 불고기. 숯향을 살짝 머금은 불고기 맛이 일품이다.


한 번은 충정로에서 조금 더 걷고 싶어서 아현역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조선 기와로 파사드를 한 <솜씨방>이란 식당을 만났다. 이 식당은 숯불 불고기가 메인이다. 이 곳 역시 손맛 좋은 주인의 깔끔한 반찬이 메인요리를 빛낸다. 후기를 보면 대부분 집밥 같았다는 평이 많았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라 음식 맛이 웅숭깊다. 


황동 불고기 불판에 육수가 자작한 서울식 불고기를 내오는 데, 주문과 동시에 파와 함께 양념을 해서 내온다. 양도 적지 않아서 부족하단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구멍이 숭숭 뚫린 불판 사이로 숯향이 스며 불고기 맛이 제법이다. 인심이 좋아 반찬은 물론 불고기에 들어가는 파를 추가 주문해도 충만한 서비스 정신으로 넉넉하게 내준다. 시골 외갓집 손맛이 그리울 때 찾으면 좋은 곳이다.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는 마포대로, 신촌로와 연결되면서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많이 간직한 곳이다. 서대문구 충정로와 중구 일대는 총독부, 식산은행 등 시내 출퇴근이 쉬운 이유로 일본인 전용 기숙사와 거주지가 많았다. 30년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아파트 기술을 국내로 도입해 충정아파트를 시작으로 회현동 미쿠니아파트(미쿠니상사 직원용), 내자동 미쿠니아파트, 창성정아파트(총독부 소속 관사), 식산은행 독신자아파트 등을 지었다.


아파트공화국에 사는 마당에 우리나라 아파트 역사를 한 번쯤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충정로 일대는 아파트박물관 같은 곳이다. 차를 타고 지나거나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주변 환경을 눈여겨볼 겨를이 없다. 가끔은 도시를 걸으면서 사방을 둘러보자. 곳곳에 보석 같은 역사 이야기가 스며있고 숨 쉬고 있다. 걸으면 역사가 다가온다. 그리고 길 끝에는 늘 맛집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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