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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로 길옆엔 볼거리ㆍ먹거리가 다양

가성비 좋은 보쌈 단일메뉴 ‘영광보쌈’      

옛 돼지갈비 맛 그리운 날엔 ‘최대포집’           


서울 시청에 볼일을 보고 충정로를 거쳐 마포로 향했다. 아현을 거치는 데 이곳은 ‘작은 고개’라는 뜻에서 예부터 애오개로 불렀다. 애오개란 이름은 작은 고개 이외에도 또 다른 뜻이 여럿 있다.  모두 그럴듯해서 어떤 게 정설인지 모를 정도다.           


애오개는 인근 만리재에 비해 고개가 아이처럼 작다는 뜻의 아이고개에서 변했다는 설이 있다. 또 옛날 도성 안에서 어린아이가 죽으면 서소문을 통해 이 고개를 지나 화장터(현 고은초등학교)로 갔기 때문에 아이고개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애오개는 한자로 ‘아현(阿峴)’이 됐다. 남쪽에 만리현(만리재)과 서북쪽 이화여대가 있는 대현(大峴)이라는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작은 고개란 의미에서 ‘애고개’ 즉 아현(兒峴)으로 부르다가 ‘兒’ 가 ‘阿’로 변해 아현(阿峴)이 됐다는 설도 있다.           


풍수에서는 한성(서울)의 주산을 부아악(負兒岳, 북한산)이라 불렀다. 아이[負兒]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母岳), 남쪽 산을 벌아봉, 모악에서 서남쪽 산을 병시현(餠市峴)이라 칭했다. 벌아봉은 아이를 못 떠나게 하는 의미이고 병시현은 떡으로 달랜다는 뜻인데 병시현이 바로 아이를 달래는 고개인 ‘아현(兒峴)’이었다는 것이다. 지명 하나에 이렇듯 많은 전설이 따라붙은 경우는 드물다.            


애오개를 넘으면 아현중학교가 나온다. 아현중학교 자리는 조선시대 가난한 전염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도성 밖 서쪽에 설치했던 의료기관 ‘활인서’ 터다. 마포대로를 따라 공덕역으로 향했다. 마포대로는 조선시대 도성에서 남대문을 지나 삼개(마포)나루를 가던 길이다.           


국빈 맞으려 경관개선한 마포대로      

       

일명 귀빈로가 불렸던 마포대로 변에 있는 외관이 수려한 동방정교회 교회건물(3D 랜더링). 이밖에도 활인서터, 경성감옥터(서부지법), 아소당 등 유서 깊은 역사문화자원 흔적이 많다

현재는 마포대교 북단부터 아현교차로까지 길이 2.8km를 이른다. 마포대로는 과거 ‘귀빈로’라는 별명이 있었다. 귀빈인 외국 정상들이 김포공항을 통해 국빈 방문을 하면 마포대로를 통해 서울 도심에 진입했다. 이때 도로 인근에 있는 초·중생들이 연도에 나와 양국 국기를 흔들며 정상을 맞이했다.    

      

1979년 6월 29일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이튿날 여의도에서 열린 서울시민환영행사를 마치고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마포대로를 거쳐 청와대로 향했다. 귀빈로는 카터 대통령 때문에 만들어졌다. 카터 대통령은 서울시민환영대회뿐 아니라 다음날 여의도침례교회와 국회 방문 일정 등 두 차례나 마포대로를 지났기 때문에 당국은 서둘러 이 지역을 정비했다.           


서울시는 카터 대통령 방한 전달인 5월 공항에서 여의도, 서울대교(지금의 마포대교), 마포로, 서소문, 시청 간 총연장 20㎞에 달하는 길을 귀빈로라 명하고 환경정비를 실시했다. 말이 정비지 시민들 사비를 들여야 하는 강제 명령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상가, 빌딩, 심지어 개인 주택까지 건물, 간판, 담장 등을 개인 비용으로 고쳐야 했다. 물론 시예산도 2억6200만원을 썼다. 이때 신민당사, 마포중고등학교 등이 재개발됐고 아현초등학교, 마포경찰서는 제외돼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마포대로를 걷다가 마포트라팰리스 2차 길 건너편 언덕바지를 보면 고색창연한 돔 지붕을 가진 교회건물이 보인다.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다. 이곳은 한국정교회 한국 관구의 중심이 되는 교회로 1903년 고종이 하사한 정동 땅에 축성한 것을 1968년에 지금 장소로 옮겨 신축한 것이다.         

 

한국정교회는 1899년 대한제국에 진주해 있던 러시아군과 러시아 외교관들을 위해 러시아정교회에서 신부를 파견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한국전쟁 등으로 한국정교회는 그리스정교회 산하로 소속이 바뀐 뒤 뉴질랜드 그리스정교회 대주교청 관할을 거쳐 2004년 6월 한국 대교구로 독립했다. 러시아, 그리스, 뉴질랜드 그리고 한국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1968년 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국내 유일의 정교회 성당으로 종교사적, 건축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종교시설물이다. 한국정교회는 서울 1곳을 포함 전국에 7개 교회 건물이 있으며 3000여명의 신자가 있다.          


고종이 하사한 정동 부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게 수탈당하고 해방 후에는 적산으로 분류돼 정부에 귀속됐다. 정교회 측은 정부를 상대로 부지 반환 소송을 벌여 승소했다. 하지만 막대한 소송비용을 구할 수 없어 정동 땅을 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송비용을 제하고 남는 금액으로 지금 터를 사 대성당을 지은 것이다.           

대성당 자리는 원래 경성감옥 교도소장 관저 터다. 경성감옥은 마포경찰서 건너편 지금의 서부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다. 경성감옥이란 이름은 원래 1908년에 서대문에 지어졌다. 당시 경성감옥 수용공간이 부족하자 마포구 공덕동 새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이라고 불렀다. 기존 서대문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불렀다. 일제는 경성감옥에서 1㎞ 정도 떨어진 마포연와공장에 죄수들을 데려가 강제 노역을 시켰다. 연와공장은 지금 삼성마포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경성감옥은 8.15 광복 이후 1946년에 마포형무소, 1961년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63년 경기도 안양시에 안양교도소를 지어 이감하면서 마포교도소는 사라졌다. 그 터에는 경서중학교를 지었고 지금은 서울서부지방법원이 들어서 있다. 서부지법 앞에는 ‘1912년 日帝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적힌 표석이 설치됐다.         

  

옛 신민당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SK허브그린 빌딩이 들어서 있다. 이 빌딩 앞 인도에는 신민당사 터 황동표지판이 박혀 있다. 삼각형 동판에는 ‘1979. 8. 11 야당 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 진압과정에서 사망’이라고 적혀 있다. 삼각형 동판은 국가폭력을 의미한다. 원형은 시민저항, 사각형은 제도 내 폭력이란 의미로 인권과 관련된 표지판이 서울에만 38개소에 설치돼 있다.           


공덕역 사거리 마포롯데캐슬아파트 앞에는 ‘공덕리 금표’ 표지석이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아소당(我笑堂) 접근을 금한다는 표석이다. 금표에는 아소당에 120보 내 접근을 불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소당은 염리동 서울디자인고교 자리에 있었다. 이 자리는 원래 미리 봐 뒀던 묏자리였다.  아소당은 대원군이 권력 무상을 스스로 비웃으면서 지은 이름이다.           


아소당 건물은 태고종 본산인 서대문구 봉원사로 이건 돼 대방 건물로 쓰고 있다. 1966년 아소당에 동도중고교가 들어서면서 봉원사에 아소정을 팔았던 것이다. 봉원사는 때마침 중창불사 중이었다. 화재로 불탄 염불당 자리에 아소정을 이건 해 대방을 삼았다.           


겨울엔 굴 추가 필수 ‘영광보쌈’ 

       

공덕역 4번 출구 뒷골목에 있는 보쌈전문점 ‘영광보쌈’.

애오개에서 공덕동 사거리까지 마포대로 일부 구간에 서려 있는 현대에서 멀게는 조선시대까지 역사 몇 장면을 끄집어냈다. 슬슬 식당을 찾아 나설 시간, 공덕지역은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식당이 제법 많아 결정 장애가 생기는 곳이다.           


1차집은 이번이 공덕역 4번 출구 뒷골목에 있는 보쌈전문점 ‘영광보쌈’으로 정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몇 해전만 해도 점심 메뉴로 물냉면, 부대찌개도 팔았지만 이제는 오로지 한 메뉴 보쌈만 판다. 굴 추가와 함께. 보쌈 메뉴로 점심 식사까지 커버를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래선지 저녁에도 보쌈에 공깃밥을 먹는 ‘밥손님’이 제법 많다.                


영광보쌈에 따르면 돼지고기는 물론 배추, 쌀, 고춧가루 등 음식에 들어가는 식재료 대부분을  국내산으로 사용한다. 다른 메뉴 없이 보쌈 두 글자만 큼직하게 적혀 있는 메뉴판에서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보쌈을 주문하면 야들야들한 살코기에 탱글한 지방이 적절하게 붙어 있는 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접시에 담아낸다.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도는 보쌈은 달금한 보쌈김치, 참기름 향이 솔솔 나는 부추 무침, 짭조름한 감칠맛이 살아있는 새우젓 등 다양한 밑반찬과 조합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겨울 한정으로 판매하는 ‘생굴’을 곁들여 짙은 바다  내음을 더해도 좋다. 식당 자랑을 참 잘해 놨다.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모두 맞는 말이다.      

       

돼지고기가 좋은 등급과 부위는 아니지만 삶는데 노하우가 있다. 누린내를 잘 잡았고 식감도 좋다. 보쌈김치는 양은 좀 아쉽지만 넉넉한 양념 때문에 헤프진 않다. 이 식당의 또 하나의 ‘한방’은 된장베이스 콩나물김칫국이다. 김치, 무, 콩나물을 넣고 된장을 풀어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여내 깊은 맛이 난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그릇만 먹은 사람은 없을 듯 매력적인 끌림이 있는 맛이다.     

       

1956년 개업 마포 터줏대감      

     

‘마포진짜원조최대포’는 1955년 공덕로터리 인근에서 처음 문을 연 돼지갈비 전문식당이다.

자리를 옮겨 2차로 ‘괴산청국장’이란 식당에서 청국장과 갈치조림을 맛봤다. 청국장 맛본 지 꽤나 오래돼서 찾았는데 평범함을 넘어서지 못했다. 지인들과 합류해서 3차로 ‘마포진짜원조최대포’엘 들렀다. 최대포집은 1955년 공덕로터리 인근에서 처음 문을 연 돼지갈비 전문식당이다. 창업주인 최한채 씨는 서울로 상경해 마장동 도축장, 식당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공덕로터리 부근에 작은 대폿집을 시작했다. 이후 공덕동 내에서 한 차례 장소를 이전했다가 1990년 지금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돼지갈비 양념은 캐러멜을 사용해 짙은 브라운색이다. 요즘은 대부분 캐러멜을 빼는데 이 식당은 여전히 과거의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돼지 목살 소금구이와 함께 오랜만에 추억의 맛을 소환했다. 요즘은 워낙 좋은 원육을 사용하는 돼지고기 식당이 많아서 맛이 앞선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옛 정취를 즐기면서 퇴근 후 동료들과 소주잔 한잔 기울이는 맛은 여전하다. 개업 초기에는 힘쓰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주 손님이었지만 지금은 회사원과 가족단위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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