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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 영동서 맛본 따끈한 설렁탕 한 그릇

아귀찜‧간장게장 유명한 신사역사거리 '영동설렁탕'

한 트로트 여가수의 노래 가사를 읊조려 본다.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1989년 문희옥이 발표한 ‘사랑의 거리’란 노랫말의 일부다. 문희옥은 당시 서울예전 2학년인 약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은광여고 3학년 때 이미 ‘팔도 사투리 메들리’ 앨범을 발매 1주일 만에 360만 장이나 팔아치운 저력의 신진 트로트 가수였다.       

이 노래는 대중가요 노랫말의 주 무대가 과거 종로, 무교동, 명동이 아니라 신흥지인 남서울 영동으로 바뀌었음을 선포하는 강남 찬가란 데 의미가 있다. 남서울 영동은 다름 아닌 강남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었다. 강남은 이들보다 뒤늦게 불린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남서울은 말 그대로 서울의 남쪽이란 의미다. 서울은 사대문을 중심으로 한강의 북쪽인 강북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945년 110만 명 수준이던 서울 인구는 1965년 34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증가 추세 때문에 도시계획 지역을 한강의 남쪽으로 확대할 필요성을 제기됐다.     

강북 원도심은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반면 한강 이남은 영등포를 제외한 지역이 허허벌판 말 그대로 무 배추밭이었다. 이곳이 과밀화된 서울 강북의 인구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정부는 1963년 ‘대서울 도시계획’을 발표했다. 인구 5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서울을 만들기 위해 서울시와 인접한 경기도 지역 12개 면 90개 리를 서울로 편입했다. 서울 땅덩어리가 268k㎡에서 596.5k㎡로 두 배 이상 확장됐다, 현재 서울의 윤곽이 이때 상당 부분 형성됐다.      


이때 서울로 편입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1966년 내놓은 도시기본계획이 '남서울 도시계획‘이다. 남서울이란 명칭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계획안은 한강 이남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인구분산 효과가 없고 오로지 택지만 늘린 원도심 중심의 ’단핵‘ 도시계획이란 비판이 일었다.      


강남이란 지명은 75년 정식 등장

    

개발 전 영동지역. 사진 차례로 70년대 초중반 신사동 사거리, 압구정동 철거현장, 현대아파트를 배경으로 농사짓는 장면. 마지막은 초기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강남이란 용어는 이듬해인 1967년 등장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공표하면서부터다. 1968년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선정, 1969년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 준공되면서 이 지역은 부동산 투기의 장이 된다. 그러면서 ‘강남’이란 단어는 투기 불패신화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는다.       


강남이라는 이름은 1975년 행정구역명으로 정식 데뷔하기 이른다. 당시 한강 이남지역 중 성동구였던 영동‧천호·잠실 지구 18개 동을 강남구로 분할 지정하면서 공식화된 법적 명칭을 부여받은 것이다. 1979년에는 영등포구에서 분구된 관악구로부터 동작구가 분리된다. 이때 관악구에 속해 있던 동작대로 동면 지역 반포아파트 지구와 방배 지구가 강남구에 편입됐다.      


강남구에 속해 있던 잠실1 2·3·4동은 포함하는 천호출장소 지역이 탄천을 경계로 강동구로 분할된다. 1988년 강남구와 강동구로부터 서초구와 송파구가 각각 나뉘면서 강남은 오늘의 서초구· 강남구‧송파구·강동구라는 4개 행정구역 체계를 완성한다.      


강남구의 탄생으로 강남이란 용어가 공식화됐지만 여전히 이 지역은 남서울과 영동이란 이름이 많이 쓰였다. 강남 최초 개발 사업 구역도 영동1지구, 영동2지구로 불렸다. 1973년 영동개발 최초로 들어선 학교명도 영동고등학교였다. 이 같은 명칭은 성동구서 강남구가 분구된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지은 잠실종합운동장 최초 명칭이 남서울운동장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한편 강북의 인구과밀도 문제였지만 영등포구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가 서울시의 숙제였다. 강의 남쪽이지만 남서울보다 먼저 개발된 곳이 영등포지역이다. 한강 남쪽에 가장 먼저 구(區)로 승격한 곳이 영등포구다. 영등포는 일제 강점 말기 군수산업 기지가 되면서 공장과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그 덕에 서울에서 인구 100만 명을 가장 빨리 돌파한 구가 됐다. 면적도 엄청났다. 1963년 행정구역도를 보면 한강 이남 3분의 2가 영등포구 관할이었다.      

 

영동은 영등포 동쪽에서 유래


강남이 영동이란 명칭을 얻은 것도 순전히 거대한 영등포구 때문이다. 영등포의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영동(永東)이란 설이 유력하지만 영등포구와 성동구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란 설도 있다. 서울시는 거대한 영등포구를 어떻게 처리할지 두 가지 안을 놓고 고민했다. 첫 번째는 영등포구를 2개 구로 나누는 것과 두 번째는 아예 시(市)로 승격하는 방안이었다.      


결과적으로 분구 안이 채택됐다. 이때 정부는 분구 기준을 인구 100만 명으로 잡았다. 영등포는 관악구로 분구한 1973년 당시 이미 130만 명에 달했다. 성북구도 100만 명이 넘어서서 도봉구를 신설해 분구시켰다. 1975년 인구의 증가에 따라 대대적인 분구 작업이 이뤄졌다. 성동구 일부를 분리해 강남구를 신설했다.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은 한강 이북의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서는 영등포와 영동‧잠실지구를 개발해 기존의 강북 도심과 함께 3개 거점의 ‘다핵’ 도시를 추진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는 앞서의 강북 ‘단핵’ 도시계획을 발전시킨 계획이었다. 강남구 신설에 이어 구 시장은 영등포구의 서쪽을 쪼개서 강서구를 신설했다. 이후 분구 기준은 90만 명으로 변하고 1979년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리‧신설됐다. 이때 강남구에서는 강동구가 신설돼 떨어져 나갔다.      


1980년에는 영등포구에서 구로구,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리됐다. 서울의 구는 17개가 됐다. 서울 인구는 계속 늘어났다. 1988년에는 75만 명을 분구 기준 인구로 삼았다. 강동구, 동대문구, 도봉구, 강남구, 강서구가 분구 대상이었다. 성동구도 인구가 75만 명이었지만 이때 분구 대상에서는 일단 제외됐다.      


도봉구에서 노원구, 강서구에서 양천구, 강남구에서 서초구, 강동구에서 송파구, 동대문구에서 중랑구가 떨어져 나가 신설돼 서울의 구는 22개로 늘어났다. 1995년에는 분구 기준을 인구 70만 명으로 조정했다. 이때 성동구에서 광진구, 도봉구에서 강북구,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리됐다. 서울시는 7차례 분구를 거쳐 지금의 25개 구 체제를 만들었다.      


한편 강남 개발은 ‘돌격 건설’ 김현옥 서울시장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겸해 오늘날 서초구에 해당하는 영동1지구부터 시작됐다. 이는 남산1호 터널 개발과 맞물린 것이다. 강북 삼일대로를 따라 남산1호터널을 지나면 한남제1고가도로가 나오고, 한남대로로 내여 앉아 직진하면 제3한강교, 지금의 한남대교를 건너 영동으로 접어들었다. 신사동 사거리는 당시 강남을 진입하는 관문역할을 했다.    

  

동호대교 건설과 지하철 3호선 신사역이 생기면서 주변의 상권이 급속히 발전했다. 반포동과 압구정동 일대에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고 교육과 문화가 강북에서 강남으로 ‘시프트’하기 시작했다. 신사역 사거리 일대는 강남북과 강남의 동서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지라는 장점을 등에 업고 유흥상권이 형성됐다. 소위 불야성을 이루는 유흥상권에 맞물려 식당가도 함께 발전했다.      


유흥업 발달과 더불어 외식업도 성황

     

신사동 아귀찜과 간장게장골목 건너편에 위치한 ‘영동설렁탕’의 수육.

신사동사거리 일대에는 두 개의 먹거리 골목이 있다. 지하철 신사역 4번 출구로 나와 우측 골목으로 접어들면 아귀찜 골목이 먼저 시작되고 한 블록 지나면 간장게장골목이 이어진다. 사실 명칭은 나뉘어 있지만 초기에는 아귀찜 식당에서 꽃게를 함께 팔았다. 물론 게장이 아니라 찜 형태였다. 신사동 아귀찜은 마산식 아귀찜이다. 마산식은 건아귀를 사용하는 것인데, 현재는 대부분 생아귀를 쓰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서울식 아귀찜이다.      

아귀찜은 70년대 서울로 퍼졌고 신사동 아귀찜 골목에서는 1977년 창업한 ‘마산아구찜'(현 마산할매아구찜) 집이 가장 오래됐다. 서울 낙원동, 방배동 등지에도 아귀찜 골목이 만들어졌다. 간장게장은 아마도 꽃게찜을 취급하다가 파생된 것이 아닐까 싶다. 가장 유명한 프로간장게장 역시 아귀찜을 함께 했던 곳이다. 1980년 문을 연 프로간장게장의 원래 상호는 목포집이었지만 프로야구 시작과 함께 하일성 씨 등 프로선수들이 많이 오는 바람에 아예 상호를 프로로 바꿨다는 일화가 있다.  

    

고릿한 소 누린내가 식욕 자극 

    

4년 만에 이달 1일부로 가격을 인상한 ‘영동설렁탕’의 김치와 깍두기. 이 두 가지 김치 맛이 설렁탕 집을 선택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다.

이들과 함께 신사동 먹거리의 한축을 지켰던 곳이 ‘영동설렁탕’이다. 아귀찜과 간장게장골목 길 건너편 골목에 위치한 ‘영동설렁탕’은 이 지역이 과거 영동으로 불렸음을 대변하는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70년대 중반에 인근에서 문을 열었다가 지금 자리에 40년 전 똬리를 튼 것 까지 45년의 업력을 자랑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영업시간 구애를 받지 않을 때는 24시간 문을 열었다. 물론 얼마 전 영업시간 제한이 풀려 지금도 24시간 영업 중이다.           


얼마 전 낮술을 한잔하러 ‘영동설렁탕’에를 갔다. 식사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수육을 한 접시 시켰다. 12월 1일 오전 8시부로 인상된 가격표가 붙어 있다. 설렁탕은 1만2000원, 수육은 4만2000원으로 각각 1000원, 4000원이 올랐다. 4년 만에 인상했다는데 코로나19 여파 때문이리라.     


문을 들어섰을 때의 고릿한 소 누린내는 ‘영동설렁탕’의 업력을 대변하는 동시에 식욕을 한껏 자극한다. 가로 장방형으로 매끈하게 빠진 홀, 모르긴 몰라도 주방까지 합치면 정방형에 가까울 듯하다. 좌식과 입식 모두를 갖춘 홀은 고객의 선택권을 보장한 배려다. 수육 한 접시와 음료를 주문하고 식탁 위를 살피니 압도적 크기의 김치통이 보인다. 한통 그득 먹음직한 배추김치와 깍두기가 담겨 있다.      


촉촉한 수육이 농염한 곰탕 같은 설렁탕 국물과 함께 나왔다. 머리고기를 위에 아래는 우설과 사태 등을 깔았다. 다양한 부위 식감을 즐길 수 있어 좋았고 부드러움이 마치 치즈를 씹는 듯했다. 이 집 설렁탕은 세 가지를 ‘빼고’ 주문하는 옵션이 있다. 사리, 조미료, 기름을 입맛대로 빼고 주문할 수 있다. 그냥 빼고만 열심히 외쳤다간 가끔 낭패 볼 수 있으니 확인이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촉촉했던 수육도 말라간다. 이럴 때 설렁탕 국물 좀 더 달래서 적셔 먹으면 된다. 누릿하고 고릿한 소 누린내 여운이 많이 남는 곳이다. 2차는 건너편 아귀찜 전문점 ‘부산아구’로 자리를 옮겼다.  


     

2차로 옮긴 아귀찜 전문점 ‘부산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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