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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녹이는 실과 바늘 칼국수와 만두

황생가칼국수ㆍ깡통만두ㆍ안동손칼국수

 찬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뜨끈한 국물 요리다. 숨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한 겨울엔 더더욱 그렇다. 마스크 때문에 소소한 겨울 일상도 사라진 지 꽤나 오래지만 그럴수록 따뜻하게 마음을 데우는 ‘영혼의 수프’가 필요한 때다.      


강북지역 대표적 한옥밀집 지역인 북촌과 이웃 동네에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칼국수 식당이 꽤나 많다. 그것도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엄청난 음식 내공을 가진 곳들이 수두룩하다. 칼국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만두다. 밀가루 반죽과 육수를 같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이 이를 같이 판다. 이번 칼럼에서는 북촌과 언저리에 있는 칼국수와 만두 전문점 몇 곳을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한다.            


◇칼국수 유래     

칼국수 일종인 닭칼국수.[사진=한식진흥원 제공]

칼국수는 밀가루 반죽을 넓게 편 후 겹친 다음 칼로 가늘게 썰어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문헌에는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지만 어떤 종류 국수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조선시대 접어들면 한글조리서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에 절면(切麵)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주재료로 메밀가루를 쓰고 반죽이 되도록 밀가루를 섞었다. 다른 문헌에서는 메밀가루를 찹쌀 끓인 물로 반죽하는 등 조선시대 칼국수는 오늘날과는 달리 메밀가루를 주로 사용했다. 당연한 것이 당시는 밀가루가 귀했기 때문에 비싸서 잔치 때가 아니면 먹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칼국수가 대중화된 것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으로부터 밀가루가 구호품으로 들어오면서 서민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의 칼국수 조리법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 볼 수 있다. “양밀가루를 물에 반죽할 때에 장을 조금 쳐서 주무르고 여러 번 친 뒤에 방망이로 얇게 밀어 잘게 썬다. 밀가루를 뿌려 한데 붙지 않도록 한 뒤에 끓는 물에 삶아내어 물을 다 빼버리고 그릇에 담은 뒤에 맑은 장국을 끓여 붓고 고명을 얹는다”고 했다.           


오늘날과 같이 밀가루를 쓰고 있지만 삶은 국수를 찬물에 헹군 후 그릇에 담고 국수장국을 들이붓는 것이 다르다. 요즘 칼국수는 주로 장국에 넣어 그대로 끓여 먹는다. 해서 국물이 탁하기는 하지만 구수한 맛을 살릴 수 있다. 여기서 장국은 고기 국물을 말한다. 고기육수를 냈기 때문에 조선시대만 해도 귀한 음식이었다. 함부로 소를 잡지 못했던 우금(牛禁) 시대에 소고기 국물에 귀한 밀가루 칼국수라니, 당대 최고급 음식 중 하나였으리라.            


◇북촌에 칼국수가 발달한 이유          

1830년 대 한양에 분포한 현방. 반촌에서만 소도살이 가능했던 것이 소비가 늘고 반인들의 생계, 성균관 재정과 맞물려 도성내 23곳에 설치됐다. [KBS화면 캡쳐]

소고기나 소뼈를 우린 육수에 삶은 칼국수는 지방에선 언감생심이었고 서울 양반가서나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권문세도가가 몰려 살았던 북촌 지역에서 칼국수가 특히 발달했다. 북촌 칼국수의 발달 배후에는 백악산 줄기 넘어 반촌이 있다. 반촌은 반궁(泮宮)이라 불렀던 성균관의 노비들이 살았던 특수한 공간이다.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정문 맞은편 일대가 반촌이었다.      


반촌 사람들은 반인(泮人)이라고 하는 데 원래 개성 사람들이다.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고려 학자 안향이 개경에 국학을 세우면서 노비 100명을 헌납했고 조선 개국과 한양 천도를 하면서 이들이 성균관 공노비로 딸려 온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이주노동자인 셈이다.     

       

반인들의 임무는 성균관의 제례를 지원하는 문묘수호와 유생들 뒷바라지하는 유생공궤다. 유학이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의 성균관 제례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례였다. 반인은 성균관이란 특수 공간의 노비란 이유로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다. 우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에서 올리는 제사와 유생들 식사를 위해 소고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성균관 내에 도사(屠肆)를 설치해 반인이 그 일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소를 잡아 필요한 만큼 쓰고 남는 건  팔 수 있었다.           


18세기 도사가 현방(懸房‧다림방‧지금의 정육점)으로 변하면서 반인들은 한양 내 소고기 판매 독점권을 얻는다. 이때 북촌(당시 행정구역상 안국방) 한가운데도 현방 하나가 들어선다. 조정은 소고기 판매 독점권을 주되 수익 일부를 학비가 무료였던 성균관 재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명분은 우금정책 위반이다. 소 도살은 위법이기 때문에 사헌부·형조·한성부 등 세 사법기관에 벌금인 속전(贖錢)을 내게 했다. 속전은 성균관 운영 이외도 사법기관 소속 하위 공무원 월급과 경상 잡비로 쓰였다. 일종의 ‘사법거래’(?)였던 셈이다.    

       

현방 운영 수입 중 속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반인들의 몫이 됐다. 당시 소고기는 물론 소 부산물이 풍부했을 것이다. 소고기 반인들은 소고기와 소뼈를 이용한 음식점 운영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 역사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 반촌, 즉 지금의 명륜동, 혜화동 일대와 북촌의 칼국수 식당이다.        

   

현 서울국제고 아래쪽에 살아서 반촌의 실상을 매일 눈으로 봐왔던 영부사 우암 송시열은 숙종 9년(1683년)에 “우리나라의 풍속이 소고기를 가장 좋은 맛으로 여겨서 이를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것 같이 여긴다”고 했다. 이는 무분별한 도살에 대한 염려지만 그만큼 소고기를 선호하던 당시 식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 칼국수 단짝 만두는 만능 식재료           

대부분 칼국수 식당에선 어김없이 만두를 함께 판다. -[사진=한식진흥원 제공]

칼국수만 팔다 보니 식단이 밋밋했다. 그래서 칼국수와 ‘투톱’ 메뉴로 개발된 것이 만두다. 만두는 중국에서 전래된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자생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치 고추가 일본 유래가 아닌 이미 한반도에 자생했다는 설과 같은 맥락이다.            


만두에 대해서는 중국 송나라 때 ‘사물의 기원’에 유래가 적혀 있다. 남만 정벌을 마치고 돌아가던 제갈량 군대가 노수라는 강 앞에서 심한 파도와 바람으로 진군을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노수에 사는 황신이란 신이 노한 것이라며 진중이 술렁거렸다.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사람의 목 49개를 베어 강에 던져야 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제갈량은 한낱 일시적인 자연현상에 사람 목숨을 해치는 것을 피했다. 대신 밀가루로 사람 머리 모양을 만들고 그 안을 소와 양 고기로 채워 황신에게 제물로 바치면서 제문을 읽었다. 제갈량은 앞으로도 사람의 머리 대신 음식을 빚어 바치라고 했다. 노수는 거짓말처럼 잠잠해졌고 남만인들은 ‘기만하기 위한 머리’라는 의미로 만두(饅頭)라고 불렀다. 또는 '남만의 머리'라는 속설도 있다.          

 

만두는 칼국수 전문점에서 마치 실과 바늘처럼 빼놓을 수 없는 메뉴가 됐다. 칼국수 손님들에게 사이드 메뉴인 찐만두로 제공되기도 하고 때론 만둣국이나 만두전골로 메인이 되기도 하는 만능 식재료다. 소고기 육수를 빼고 나온 양지나 사태는 수육으로 변신한다. 그래서 대부분 칼국수 집 메뉴는 칼국수, 만두, 수육이 주축을 이룬다.            


◇ 북촌의 특색 있는 칼국수 전문점          


북촌칼국수 대명사 ‘황생가칼국수’      

 

황생가칼국수의 돼지목살 보쌈, 칼국수와 만둣국.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에 2017년부터 연이어 빕 그루망(합리적 가격에 훌륭한 음식)에 선정된 곳이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긴 대기 줄이 인상적인 곳이었지만 요즘은 전보다 덜하다. 양지와 사태를 우려낸 육수로 ‘하이엔드’한 맛의 칼국수를 제공한다. 육수에서 고릿함이 느껴질 정도로 진한 것이 특징이다.           


2001년 ‘북촌칼국수’란 상호로 시작해 20년 차를 맞고 있다. 2014년에 주인의 성씨를 따 상호를 바꿨다. 이유는 상호에 북촌을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특허법원 판례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모 씨가 ‘북촌’이란 명칭을 먼저 선등록 했고 이를 프랜차이즈인 ‘북촌손만두’에 빌려주면서부터 일이 생겼다. 이 씨는 북촌이란 단어가 들어간 각 업소에 사용료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업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상호를 바꿨다.      

             

상호는 변했어도 맛은 그대로인지라 손님은 예나 지금이나 문전성시다. 입구를 들어서면 잰 손놀림으로 왕만두를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본 이상 만두 한 접시를 시키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 만두 빚는 식당의 고도의 쇼잉 마케팅이다. 만두소에 쓰이는 재료는 매일 아침 장을 통해 마련한다.           


부드러운 면발의 칼국수가 진한 육수와 함께 입안으로 딸려오면 겨울이 온 데 간 데 없어진다. 백김치의 시원함과 겉절이의 정석을 따른 김치 맛이 딱 떨어진다. 알찬 속을 자랑하는 만두는 슴슴함으로 식객을 위로한다. 만둣국 육수는 칼국수보다 옅은데, 이는 만두 본연의 맛을 느껴보란 배려이지 싶다. 소고기와 돼지수육을 모두 취급한다. 발레파킹과 주차비가 무료다.          


재동초등학교에서 황생가를 가기 위해 넘는 고개 이름이 홍현(弘峴)이다. 고개의 흙색이 붉은 데서 유래했다. 실제로 종로구청서 터파기 공사를 하면서 붉은색 계열의 흙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후 홍현 표지석을 세웠다. 붉은 벽돌조 건물은 ‘홍현 ; 북촌마을 안내소 및 편의시설’로 2016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맛에 친절을 더하는 ‘깡통만두’       

    

깡통만두의 칼만두와 손만두국, 만두전골, 모둠전.

북촌은 한옥밀집지역이란 지역적 특색 때문에 복고 분위기 식당이 아직은 주도권을 쥐고 선전하는 곳이다. 그중 젊은이들 입맛을 가장 성공적으로 공략한 곳이 ‘깡통만두’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 그릇 만둣국에 몸을 데우기 위해 식객들이 추위를 마다하지 않고 줄을 서는 곳이다. 이곳은 상호대로 만두전문점인데, 만두 본연의 맛을 접할 수 있다는 평이다.          


칼만두란 메뉴로 혼자서도 두 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게 했다. 칼만두는 칼국수와 속이 꽉 찬 어린아이 주먹만 한 만두가 3개 들어있다. 만두소를 구성하는 식재료의 조합이 좋고 물기를 완전히 잘 짜내서 식감이 폭신하다. 여름엔 기본 만두, 새우만두 두 종이 나오고 요즘 같은 겨울엔 김치만두가 추가된다.          


독특함 때문인지 비빔칼국수를 많이 찾는다. 육전이 듬뿍 올라간 비빔 칼국수가 특색이 있는데 이는 문래동 영일분식 비빔칼국수와 또 다른 버전이다. 육전이 맛과 식감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시각적 효과와 밀가루의 허기를 채워주는 보완재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만두전골을 주문하면 식당주가 맛있게 먹는 법에 대해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정갈한 요리, 맛있는 음식, 친절한 응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손님 지향적인 곳이다. 이태원에서 20여 년 정도 영업을 하다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         

  

몽양 여운형 집터 위 ‘안동손칼국수’     

안동손칼국수의 칼국수와 누른호박전.

몽양 여운형 집터 위에 있는 양지 육수 베이스의 칼국수집이다. 육수인 듯 하는 듯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늙은 호박을 채 썰어 부친 누른호박전이 별미다. 늙은 호박 너 댓 개를 보란 듯이 진열해 놓고 있다. 만두집 만두 빚는 모습과 겹치는 광경이다. 배추김치와 함께 내놓는 부주김치가 제법 국수와 어울린다. 1984년 개업해 37년 업력을 자랑한다. 현재 3대 대물림 중이다.           


1989년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한옥이었던 몽양의 집 절반이 잘려나가 길이 됐다. 남은 건물 외벽을 붉은 벽돌로 마감하고 옛집 일부를 살렸다. 그곳에 칼국수 식당이 들어선 것이다. 2013년에 가스레인지로 인해 불이 나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몽양의 집 흔적이 모두 소실됐다. 방송에도 나올 정도였다. 이후 외벽을 회색조 현무암으로 바꿨고 길 건너 표석만이 몽양의 집터임을 알리고 있다. 돼지수육은 사전 주문해야 하고 전석 좌식(座式)이다. 네이버 검색은 ‘안동손칼국수 계동점’이다. 그만큼 겹치는 상호가 많아서 변별력을 주기 위함이다.

          

안동칼국수에서 LG상남도서관이 있는 창덕궁 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비원칼국수’가 나온다. LG상남도서관은 독특한 외관을 가진 건축물이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가 1967년 건축가 김수근에게 설계를 맡겨 지은 저택이다. 인화를 중시하는 LG家답게 3대가 함께 거주할 수 있도록 지었다. 지금은 연암문화재단에 기증돼 전자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식사하러 가는 길에 한번쯤 눈여겨봄직한 현대 건축물이다. 아! 비원칼국수도 안동칼국수와 같은 가격대에 부추김치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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