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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박수근 展’을 닮은 질박한 막걸리 한잔 집

널찍한 한옥 '대련집'ㆍ오래된 골목집 '다락'

널찍한 한옥서 맛보는 칼국수·보쌈 ‘대련집’

능란한 요리의 변주를 느낄 수 있는 ‘다락’        


대표적인 현대화가 박수근의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회가 지난해 11월부터 올 3월 1일까지 100여 일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로 덕수궁 미술관 전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회에는 회화 작품 수 100여 점과 자료 200여 점 등이 나와 10년에 한번 열릴까 말까 할 정도의 매머드 한 기획전이었다.        


가난한 한 천재화가가 길잡이 한 봄으로의 초대전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그 사이 필자는 3회에 걸쳐 전시장을 찾아 대가의 작품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작품 앞에 설 때면 때론 가슴 저미고 어떤 것은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느낌을 받았다. 기교보다는 가난의 질곡과 한국적 정서를 담뿍 담은 서민 생활을 담으려는 그의 천착이 감정이입됐다.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

대표적인 현대화가 박수근의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회가 지난해 11월부터 올 3월 1일까지 100여 일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로 덕수궁 미술관 전관에서 열렸다.

전시회는 그의 삶과 예술이 한마디로 ‘서민의 화가’라고 요약해 보여줬다. 곤궁한 시절, 힘겨운 화가의 녹록지 않았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캔버스에 담겼다. 그는 1914년 강원도 양구읍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땐 금수저였지만 아버지가 광산업을 하다가 망해 가세가 기울었다. 이 때문에 그는 초등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평양에서 일자리를 얻어 살던 그는 한국전쟁 중 월남해 부두 노동자, 미군부대 PX(현 신세계백화점)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당대 최고의 미전인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차례 입선한 그였지만 전쟁 중이라 변변한 일자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전 후 선전에서 이름이 바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하면서 화단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힘들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그는 삶의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같이 살아가는 이웃들의 무던한 모습을 담담하게 그렸다. 절구질하는 여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길가의 행상들, 아기를 업은 소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김장철 마른 가지의 고목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박수근은 생전 예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그의 부인 김복순 여사가 쓴 ‘아내의 일기’를 보면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진 마음을 그려야 한다는 극히 평범한 예술관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여사는 ‘맷돌질하는 여인’의 실제 모델로 이 작품은 제19회 선전에서 입선했다.      


화가의 이러한 마음은 곧 그의 예술 의지가 됐다. 서민의 모습을 단순히 인상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평면화 작업으로 추구했다. 주관적 감정의 대상이 아닌 모든 개인의 감정에서 독립된 완전한 객체로서의 서민으로 대상화했다. 이는 부동의 그만의 형식이 됐고 마애불이 새겨진 화강암 질감 같은 따뜻한 정과 중세 유럽 기독교의 정적인 영적 분위기를 동시에 자아낸다. 이는 후대에서 그가 가장 서민적이면서 가장 거룩한 세계를 보여준 화가로 평가받는 바탕이 됐다. 아울러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화가로 평가되고 있는 이유다.      


12세 되던 해 밀레의 ‘만종’ 복사판을 보고 감격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였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박수근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기를 기도했다. 다만 밀레 풍의 화려한 기교는 따라 하지 않았다. 외려 박수근은 소박하고 때론 어수룩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 씨는 “밀레의 작품이 엄격한 기교에 바탕을 둔 묘사의 극치였다면 박수근은 기교 없는 둔중함과 가식 없는 솔직함 투명하게 새겨져 있을 뿐”이라고 평했다.  

    

19세부터 51세 타계까지 작품 총망라

     

창신동 시절 화실을 겸했던 대청마루에서 박수근과 그의 가족들.

박수근의 회화가 갖는 독자성은 기법에 있다. 초기에는 거의 모노톤에 가까운 제약된 색채를 구사했다. 단색 기조를 지향했으나 평면적이며 단조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다. 50년대 들어서는 마치 벽돌을 쌓는 듯한 견고하고 입체적인 마티에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색을 발라 쌓아 올림으로써 평면과 단조로움을 극복했다. 이로 인해 색채는 더욱 은은하고 육중한 느낌을 가졌다. 두텁고 투박하고 거칠지만 원초적으로 투명한 질감과 따스함을 잃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코앞에 두고 마티에르를 감상하면서 느낀 감성은 ‘뜨거움’이었다. 유화 물감이 갖는 기름기를 끊임없이 걸러내면서 마친 거친 벽돌을 쌓아 올리듯 캔버스에 발라 올렸기 때문에 유화 특유의 광채나 번질거림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이런 수 없는 ‘쌓아 올림’ 속에서 한국적 질감을 찾아내는 성과를 얻었다. 이는 마치 삼베옷에서 느낄 수 있는 질박한 우리네 질감이다. 이 같은 기법이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은 그가 작고하기 전 60년대 초반 무렵이다.     


박수근의 인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팬덤을 형성했다. 1985년 11월 현대화랑서 열린 박수근회고전에 몰린 관람객 풍경은 신문에도 자세하게 실릴 정도였다. 한 일간신문에 따르면 당시 그의 회고전에 열흘 동안 하루 평균 700명, 연인원 7200여 명이 유료 관람했다고 전한다. 이 같은 현상은 개인화랑이 연 국내작가 전시회로는 처음 있는 일이라는 부연도 붙었다. 미술 시장이 지금과 같지 않은 시절임을 고려할 때 큰 반향이었던 것이다.      

미술평론가 유준상 씨는 당시 “불과 20년 전에 몇 천 원씩 하던 작품 값이 몇 천만 원으로 올라 일반의 호기심이 생겼고 박수근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의 말을 되짚으면 60년대 만해도 박수근의 작품 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지금은 수십억을 호가하는지라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주최 측은 이번 전시가 박수근의 생애와 자취를 살피고 작품을 감상하면서 ‘우리의 박수근’을 만나기 위해 마련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박수근이 19세에 그린 수채화부터 51세로 타계하기 직전에 그린 유화까지 그의 전 생애 작품과 자료를 망라했다.      


전시는 덕수궁 미술관 전관을 4개로 나뉘어 구성됐다. 네 개의 전시실은 각각 박수근의 부인 김복순 여사, 소설가 박완서, 아들 박성남, 그리고 일찌감치 박수근의 진가를 알아본 컬렉터와 비평가의 시선을 따라 구성됐다. 동시에 박수근이 살았던 서울 창신동부터 그가 일하고 자주 찾았던 명동, 을지로까지 박수근의 공간을 담았다.     


전시 제목인 '나목'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참혹했던 혼돈의 시대를 살아간 곤궁한 이웃 사람들,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면서 예술혼을 불태운 박수근의 뜨거운 생을 상징하고 있다. 이파리 하나 없는 ‘나목’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웅장한 불꽃을 피워낸 역설적인 자신의 삶을 나목에 투영했던 것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박수근이 살았던 1950년대와 60년대 전후의 우리 사회와 서울 풍경, 당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는 경험은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첫째 날은 전시회장을 빠져나와 종로구 관수동에 있는 ‘대련집’을 찾았다. 마침 전시장에서 만난 지인의 추천으로 찾은 곳이다.     


“비 오는 날 오시면 좋아요”

   

‘대련집’ 칼국수와 보쌈, 북어찜.

‘대련집’은 스스로 ‘을지로 비오는 날 가면 좋은 칼국수 보쌈 맛집’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이날도 보쌈과 칼국수를 기본으로 하고 북어찜을 곁들였다. 대련집은 김중업이 설계한 삼일로빌딩 건너편 파고다타워가 들어선 자리에 있다가 지금 자리로 한 블록 이전했다. ‘대련집’은 과거 꽤나 큰 한옥이었을 것을 짐작케 하듯 대문에서 안채까지 꽤나 거리가 있고 지금은 입식 홀이 된 너른 안마당을 가지고 있다. 안채와 사랑방, 대청 등은 좌식 형태로 손님을 맞고 있다.      


‘대련집’과 등을 지고 맞닿은 곳은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인 이벽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벽의 집에서는 정약용 등이 첫 세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현재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란 표석이 세워져 있고 전태일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에는 꽤나 큰 한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곳이라 그런지 ‘대련집’도 꽤나 넓다. 카운터 앞 구석진 곳에 놓인 주련이 옛적 큰 한옥이었음을 소리 없이 증언하고 있다.      


널찍한 실내라 옆 자리 소음도 자연스레 공간으로 스며들어 비교적 차분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사골 베이스 칼국수는 기본 이상 준수한 맛을 냈고 보쌈 또한 뛰어나진 않지만 빠지지도 않았다. 다만 잘게 나뉘어 제공된 북어찜은 그동안 마리 채 통을 제공받았던데 익숙한 식객에겐 생소한 모양이라 다소 당황했지만 맛으로 용서가 됐다.      


전시 둘째 날은 관람 후 여러 식당을 전전했지만 죄다 실패하고 마지막 집 하나를 간신히 건졌다고 할 만큼 선택에 문제가 많았다. ‘고려삼계탕’, ‘서소문 연탄구이‘. '장호 왕곱창'(본점)을 전전했지만 옛 추억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대성집‘을 향했지만 일찌감치 문을 닫느라 마감 중이었고 하는 수 없이 근처 ’명원갈비‘에 들러 진한 갈비탕으로 섭섭함을 달랬다.     

 

막다른 골목서 느끼는 구옥의 정취  

     

족조림, 칼뱅이, 스지수육,  보들탕(계란탕) 등 다양한 변주의 요리를 선보이는 ‘다락’

세 번째 관람 후엔 박수근이 살았던 창신동을 지나 신당동 ‘다락’을 찾았다. 박수근은 창신동 동대문 아파트 인근에 살았다. 오래전 그의 집터를 찾았을 땐 빗물 배관에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란 아홉 글자로 달랑 흔적이 남았었는데 최근엔 여러 공을 들였단 소식을 들었다.     


‘다락’은 고대 앞, 대학로, 서촌을 거친 호질이 신당동 오래된 막다른 골목길에 지난해 홀연 똬리를 튼 곳이다. ‘다락’이란 상호는 실제로 두 사람만 앉을 수 있는 다락(로프트형태)에서 따왔다. 꾀나 오래된 가옥을 리모델링했지만 옛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곳이다.      


음식 해석이 남다른 양지은 대표는 1984년 고대 앞서 호질로 암울했던 시대 청년들의 울분을 음식으로 위로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외식인이다. 서촌서 본의 아니게 젠트리피케이션의 당사자, 피해자가 됐지만 굴하지 않고 신당동 구옥에 잘 스며들었다.      


직접 가보면 이런 골목에 어찌 이런 알토란 같은 식당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숙이, 그리고 은밀하게(?) 자리 잡았다. 막다른 길이 주는 매력, 다락방이 있는 옛 가옥이란 정취가 앞으로 주객들의 성지화를 예고한다.      

무엇보다 양 대표의 언터쳐블하고 능란한 변주의 요리 솜씨가 최고의 매력이다. 족조림, 칼뱅이, 스지수육, 보들탕(계란탕), 곰소젓갈과 흑임자두부 등 나오는 메뉴마다 스토리가 차고 넘친다. 주인맘 안주란 것도 있어서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음식을 맛보는 재미를 더했다. 게다가 다양한 전통주를 준비해 음식과의 합을 잘 맞췄다. 박수근 전의 진한 여운과 뭉클하고 뜨거운 가슴을 진정시키는 막걸리 한잔, 봄맞이는 그것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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