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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역사를 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중화요리    

구로 중식 강자 ‘진사향’과 ‘송화강주’의 절묘한 조합

[유성호의 맛있는 동네 산책] 우리나라 화교 역사는 눈물겹다. 상권을 쥐락펴락하며 승승장구하던 화교는 중국의 청일전쟁 패배, 일본의 조선 강제합병, 한국전쟁, 대만과의 국교단절 등 역사를 거치면서 정체성 혼란과 극도의 차별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한국 화교의 시초는 1882년(고종19년)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광둥성 수사제독(水師提督) 우창칭(吳長慶) 휘하 군대를 따라 들어온 40여 명의 군역 상인이다. 요즘 말로 하면 PX 운영을 위해 따라온 것이다. 주둔기간이 길어지면서 조선인을 상대로 무역업을 했고 청나라는 ‘상민수륙무역장정’이란 통상조약을 강제해 화교 유입 물고를 텄다. 


 임오군란 때 淸 군대·상인 유입…화교의 시작


  


▲ 임오군란 때 군대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청나라 수사제독 오장경과 그를 기리는 사당인 오무장공사 안에 있는 비석.


이듬해 300여 명의 상인과 관리가 서울, 인천, 부산 등에 들어왔고 1884년에는 인천에 화상조계지가 만들어짐에 따라 인천에만 1000여 명이 넘는 화교가 주재했다. ‘사농공상’의 서열을 두고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 상권을 파고든 화교는 짧은 시간에 거대 화상(華商)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주로 면포, 삼베, 비단 등을 중개무역해 조선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한국 화교의 90%가 산둥성 출신이다. 임오군란 때 들어온 상인들은 남방지역이었지만, 이후로는 1894년 청일전쟁과 1899년 의화단의 난 등 중국 내 정변으로 인해 산둥성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피난지인 한국, 그것도 인천 쪽으로 대거 유입됐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화교는 서울, 인천, 부산 등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인구가 3000만 명일 때 화교 수가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우리 정부는 화교 상권이 강화되는 것을 가만 놔두질 않았다. 화교상권에 장악된 동남아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종 차별정책과 규제를 펼치면서 이들의 돈줄을 옥좼다. 정부는 외국인의 외국환사용금지, 창고 봉쇄령(1950), 외국인토지법(1961), 외국인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률(1970) 등으로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고 기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무력화시켰다. 


이들 정책은 무역을 기반했던 화교 상권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경제력을 강제로 ‘무장해제’시켰다. 특히 토지소유 제한으로 인해 상당수가 화교가 우리나라를 떠났고 남은 이들은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외식업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됐다. 화교가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노동자인 쿨리(苦力) 신분으로 시작한 반면 우리나라에서 임오군란 때 정부의 요청으로 들어온 상국(上國) 신분으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정착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난 차별을 받았던 것이다. 


 한국 화교 90%가 중국 산둥 출신

                            

▲ 오무장공사 내외부 전경. 서울 연희동 한국한성화교중학교 뒷산에 있다.


한국 화교 대부분이 산둥지역 출신이다 보니 자연스레 산둥식 요리가 ‘중화요리’란 이름을 달고 자리 잡았다. 중화요리의 정의는 화교들이 중국 본토 요리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특색 및 한국인 입맛에 맞춰 새롭게 변형시킨 중국요리를 의미한다. 중화요리는 미국식, 일본식, 유럽식 등 각 지역에 맞게 현지화된다.


청나라 군대 조계지였던 인천은 청국 상인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들 유입이 증가하면서 크고 작은 중국음식점, 호떡집, 만두집 등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중국음식점으로는 공화춘(共和春), 중화루(中華樓), 동흥루(東興樓) 등이 있었다. 공화춘은 원래 이름이 객잔 형태로 운영되던 산둥회관이었다. 서울에는 현 소공동 롯데호텔 주차장 자리에 아서원(雅敍園)이 유명했다. 산둥성 출신 서광빈 씨가 중국인들과 공동창업했다. 대부분 산둥 출신 사람들이 관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한국 중화요리는 20세기 초 산둥성 요리의 원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산둥 요리는 1920년 대 전성기를 이뤘다. 이때 자리를 잡은 산둥 요리가 화교들에 의해 국내로 유입된 후 중국 본토와의 정치·문화적 단절로 인해 큰 변화 없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청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식재료인 해삼, 죽순, 청경채 등이 지금도 중화요리에 많이 쓰이고 있다. 우리가 중국요리를 ‘청요리’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사향> 진생귀 사부 아버지도 산둥 출신                   


▲ 구로역 인근 코코모호텔 지하 <진사향>의 진생귀 사부가 한국 화교 역사와 요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 구로구 구로역 인근 코코모호텔 지하에 있는 <진사향>의 진생귀 사부 역시 본향이 산둥성이다. 진 사부의 아버지는 산둥 출신으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내전에 돌입하게 되자 한국으로 피난을 왔다. 진 사부는 영월에서 태어났다. 국내 화교 대부분이 중국 출신이지만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국적을 대만으로 바꿔야만 했다. 기구한 화교의 운명이다. 


화교들의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영월에서 진 사부의 아버지는 집 마당에 화교학교를 만들고 선생을 초빙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워 상당수가 배움을 이어가지 못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진 사부 역시 1970년 일찌감치 중국 요리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 세월이 올해로 만 50년, 반백년이 흘렀다. 그는 현업에서 여전히 웍을 쥐고 있는 중식계 ‘살아있는 전설’이다. 


진 사부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 강남경찰서 맞은편 한국감정평가원 뒤쪽에 있었던 <진가방>이었다. 이후 몇 차례 점포를 옮길 때마다 찾아서 인연을 이어갔다. <진 가방> 때부터 단골이던 한 손님이 그의 요리 솜씨를 알아보고 지금의 자리를 권유했다. 그래서 2018년 하반기 <진사향>을 열고 지역 중식계를 빠르게 평정했다. 


<진사향>의 가장 큰 장점은 실력 있는 셰프의 음식을 합리적 가격에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 사부의 실력은 50년 세월이 자동으로 보증하지만 단순히 누적된 시간만이 그의 진면목을 대변하지 않는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은 지난해 7월 공중파 방송에 멘보샤가 소개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진사향> 멘보샤는 넉넉한 새우살로 압도적 두께를 자랑한다. 워낙 두꺼워서 외피인 식빵을 반으로 슬라이스 해서 사용할 정도다. 


  멘보샤·수제군만두가 <진사향> 시그니처 메뉴


▲ <진사향>의 시그니처 메뉴라고 할 수 있는 새우살이 풍성한 멘보샤와 ‘겉바속촉’ 수제군만두.


멘보샤와 함께 유명세를 타고 있는 단품으로는 수제군만두가 있다. 진 사부가 직접 빚은 만두를 웍에 넣고 한쪽면만 바싹하게 기름에 튀겨낸다. 만두 8개가 붙어서 한 세트 인양 튀겨져 나오는데, 한마디로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육즙으로 촉촉)이다. 멘보샤와 수제군만두는 <진사향> 요리를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있는 시그니처 음식이다.   


<진사향>의 또 다른 매력은 가성비 갑의 코스요리에 있다. 1만1900원부터 시작하는 런치 코스메뉴와 2만3000원부터 맛볼 수 있는 디너 코스메뉴는 가격대비 훌륭한 맛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말이면 외식을 즐기는 가족단위 손님으로 웨이팅을 감수해야 할 정도다. 신도림역 상권 때문에 발달하지 못한 구로역 주변은 외식문화가 활발하지 못했다. <진사향>은 단 기간에 구로역 주변 외식 상권을 견인하는 대표주자로 성장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진 사부의 50년 중식 내공이다. 지난 2015년 SBS Plus에서 12부작으로 만든 ‘강호대결 중화대반점’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목란> 이연복, <홍보각> 여경래, <신> 유방녕 셰프와 <진가>의 진생용 셰프가 출연했다. 이연복, 여경래, 유방녕 셰프는 진 사부의 친구와 후배이고 진생용 셰프는 친동생이다. 원래 진 사부가 출연할 자리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동생에게  양보했다는 후문이다. 


중식조리사계는 집안 별, 출신 식당별 등을 기준으로 ‘문파’로 많이 나뉘는데 중화대반점 프로그램으로 ‘4대 문파’가 생겼다. 출연진 모두 중식업계에서 쟁쟁한 일가를 이루고 있고 성(姓)이 모두 달라 자연스레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향> 외벽에 ‘4대 문파’ 출신이라고 표기된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연유다.        


우리 입맛 맞춰 중국서 만들어 온 백주 ‘송화강주’


▲ 농향형 저도주인 송화강주는 우리 레시피를 가지고 중국서 만들어 온 한국 술이다. 중국에서는 유통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요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중국술이다. 최근 필자는 <진사향>에서 단품 요리 몇 가지와 함께 백주인 ‘송화강주’와 궁합을 맞춰보는 시간을 가졌다. 송화강주는 1917년 설립된 목단강백주유한공사에서 생산하는 ‘한국 술’이다. 중국에서 만든 술이 한국 술이라면 의아해할 것이다. 송화강주는 한국에서 레시피를 제공해서 만든 후 전량 국내로 들여오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유통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중국산 한국 술이다. 


송화강주의 원료는 만주에서 자란 홍수수다. 수수는 한자로 고량(高梁)이다. 그래서 수수로 만든 중국술을 고량주라고 부른다. 만주지방의 중요한 술이다. 예로부터 산동, 천진 등 동북지방에서 제조됐다. 알코올 함량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중국 증류주는 항아리에서 숙성시키기 때문에 숙성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색이 변하지 않아 백주라고 불렀다. 송화강주 역시 청정 만주 평야의 홍수수를 이용한 백주다. 주정도 직접 생산한 것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고급 백주의 특징인 여향(餘香)이 짙다. 


송화강주는 14일 이상 진흙 속에서 자연발효를 시키는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는 중국 국주(國酒)라 일컫는 귀주 마오타이와 같은 발효방식이다. 목단강백주유한공사는 한국인이 선호하는 농향형 백주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다. 


백주는 향에 따라 농향(濃香), 청향(淸香), 미향(米香), 봉향(鳳香), 시향(豉香, 메주향), 지마향(芝麻香, 참깨향), 특향(特香), 농장겸향(濃醬兼香), 노백간향(老白干香), 장향(醬香) 등 10가지 형태로 나누기도 한다. 향은 주로 원료, 생산기술, 발효, 설비 등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농향형 백주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의 명주 중 노주노교특곡, 검남춘, 양하대, 고정공주, 오량액 등이 농향형 백주에 속한다. 


백주의 알코올 도수는 일반적으로 40도 이상이다. 중국은 최근 들어 37·38도의 낮은 도수 술을 개발해 소비자 층을 늘렸다. 고액법백주(固液法白酒)의 국가 표준에 따르면 도수 41~60도의 백주를 고도주, 18~40도를 저도주로 분류한다. 송화강주는 34도로 저도주에 속한다. 


중국은 한족과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공화국이다. 56개 민족 중 이슬람을 믿는 회족을 뺀 나머지 민족은 고유의 술 문화가 있다. 산둥 지역은 ‘경삼배(敬三杯)’라는 주법이 있다. 모두가 서로 술을 권하기 전에 먼저 석 잔의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술자리에 늦은 사람에게 석 잔을 마시게 하는 ’후래삼배‘ 문화가 있는데 경삼배와 비슷한 형태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술이 없으면 예를 다하지 못한다’(無酒不成禮儀)고 해서 일상적으로 모든 행사에 술이 빠지지 않는다. 명절이나 결혼식, 직장 회식 등 행사에서 궁합이 잘 맞는 술을 선택해 궁합을 맞추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음주 문화다. 송화강주의 마리아주(조화)를 위해 진 사부가 준비한 음식은 오향장우육, 유린기, 전가복, 동파육이다. 


오향장우육·동파육 등과 송화강주 조합 좋아

                           

▲ <진사향> 진생귀 사부가 준비한 오향장우육, 유린기, 전가복, 동파육. 이들과 송화강주의 마리아주(조화)를 진행했다. 


한국식 중화요리에는 자극적인 중국식 향신료를 빼고 달근하게 만든 특징이 있다. 우리 입맛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입맛에 맞췄다. 대표적인 것이 짜장면이다. 화교들은 독특한 향신료를 쓰는 중화요리의 정통성을 버린 대신 경제적 실리와 타협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요리에 전분가루와 굴 소스를 집어넣는 바람에 맛이 비슷해졌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진사향> 진 사부는 “오로지 중화요리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느새 요리 인생 50년이 넘었다”며 “음식은 인간의 진정성을 담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정성을 다해 가족에게 해주는 마음으로 주방에 선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송화강주에 대해서는 “여러 백주들이 있지만 한국인의 입맛을 잘 고려해서 만든 향이 튀지 않고 목 넘김이 훌륭한 술”이라며 “특히 육류와 궁합이 잘 맞는다”고 평했다. 


송화강주 김유상 대표는 “중국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백주 중에서 송화강주는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맛을 가장 잘 살린 술”이라며 “중국 정부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업 중 엄격한 선정 기준을 통해 뽑은 ‘중화라오즈하오’ 인증을 받은 백주 공장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품질과 맛을 보장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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