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맛동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표석을 따라 걷다가 스며든 동네 맛집들

서울시내 표석 답사 후 미식기행으로 마무리

옛 서대문정거장 맞은편 미근동 ‘서대문족발’

176개 표석 부자 종로구의 ‘종로할머니국수’        


길을 걷다가 인도 주변에 설치돼 있는 표석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표석은 문화유적이 있던 자리나 역사적 사건, 역사 인물들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일종의 정보제공 역할을 한다. 표석이 세워져 있다는 의미는 더 이상 역사적 건축물이나 사건과 인물의 흔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 변화에 따른 도시개발로 인해 도시구조와 경관이 변하면서 필연적으로 문화유적 소멸이 뒤따른다. 비근한 예로 성동역 터가 있다. 표석 문구는 ‘성동역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경춘철도회사가 부설한 사설(私設) 철도 경춘선의 출발역이다. 광복 후 사철이 국유화되면서 1970년대 출발역이  청량리역으로 이전하고 건물이 헐리기 전까지 30여 년간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임산물과 농산물을 실은 화차가 성동역으로 들어왔다’고 적혀 있다.      


성동역의 기능이 사라지면서 터에는 제기동 미도파백화점이 들어섰고 지금은 한솔동의보감이란 쇼핑센터로 상업시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시는 성동역이 있던 터를 표시하기 한솔동의보감 건물 앞 보도와 차도 사이에 표석을 세웠다.         


표석은 서울이란 공간 정보제공 기능   

문화지평이 주관하는 ‘표석이 품은 소멸문화유적을 따라 톺아보는 서울 역사’ 2회 차 답사 출발지인 운현궁에서 찍은 단체사진.

삼일대로(안국역~한남초등학교)의 확장으로 인해 천도교의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수운기념관)이 철거됐다. 현재의 천도교 본당 주차장 부지다. 대신사는 천도교 모태인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를 칭한다. 그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1925년 지은 것으로 한국 근대건축 선구자인 이훈우의 대표작이다. 각종 시국 행사는 물론 다양한 문화, 스포츠 이벤트가 열렸던 공간으로 상당히 큰 건축물이었다.     


유서 깊던 이 건축물은 1970년대 초 건물 앞 삼일로가 삼일대로로 확장되면서 사라졌다. 이 건물은 성신가정여학교(성신여대 전신), 동양공과학원(한양대 전신)의 교사로 사용됐다는 기록도 있다. 또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군수공장으로 쓰기 위해 징발하기도 했다.      


1944년 종로구에서 일부를 빌려 호적과 업무를 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역사적 시층(時層)을 가졌던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개발 논리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아쉽게도 이곳엔 수운기념관이 있었다는 기록을 담은 표석이 없다. 사라진 모든 것에 표석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표석은 1985년부터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신설 및 정비계획’에 따라 설치되기 시작했다. 서울시 문화재정책과 ‘2023년 역사문화유적 표석 정비 계획’에 따르면 올 1월 현재 서울 시내에는 총 335개의 표석이 설치돼 있다. 이 중 종로구(176), 중구(78) 등 도심에 271개(80%)가 집중 분포돼 있다. 강남구, 강북구, 노원구, 관악구, 구로구, 양천구, 중랑구 등 7개 구는 표석이 설치된 곳이 하나도 없다. 이는 역사적인 기억할만한 장소성과 역사성이 없단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올해 서울시내에 있는 표석이 품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가 운영하는 문화지평은 서울시 공익활동지원사업에 선정돼 표석 답사를 7회에 걸쳐 진행하고 이미 2회를 마쳤다. 3회 차는 오는 17일 ‘나루터와 물산의 표석길’이란 주제로 양화진나루터에서부터 마포 토정터까지 답사한다.      


답사의 주목적은 표석에 담겨 있는 역사지만 장시간 걷고 난 후의 식후경도 목적 중 하나다. 행사에서의 식사는 행사만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지표다. 최근 각종 축제장에서 음식 바가지요금이 문제가 되고 있다. 흥겨웠던 축제는 사라지고 짜증만 남는다. 다음 해 축제 재방문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음식은 축제의 마무리이자 내년을 기약하는 ‘새끼손가락’ 같은 존재다. 그래서 문화지평 답사도 늘 뒤풀이 식사에 신경을 쓴다.      


성인 3명이 남길 정도 푸짐한 족발   

미근동 ‘서대문족발’은 큰 앞다리를 사용해 양이 푸짐하고 은은한 맛과 향으로 인기가 많은 족발집이다.

1차 표석 답사는 동대문 전차차고터에서 서대문정거장터까지였다. 자연스레 서대문정거장터 인근의 맛있고 여럿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찾았다. 전에 같았으면 서대문로터리 근처에 있는 ‘통술집’에서 돼지갈비를 구웠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년간 적자가 늘면서 1961년 개업한 지 61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찾은 곳이 ‘서대문족발’이다.     


일행 6명이 남아 ‘서대문족발’ 본점을 계획하지 않고 불쑥 스며들었는데 운 좋게 딱 6인 테이블이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크기 구분 없이 족발, 매운 족발로 구분하는 걸 보니 전족 한 종만 쓰는 듯하다. 족발 두 접시를 주문하고 모자라면 녹두전, 주꾸미볶음, 막국수를 추가하려 했지만 결론적으로 족발도 다 못 먹어서 남은 것을 포장했을 정도다. 그만큼 양이 풍성했다.      


서비스로 내주는 수제비 국물에 들어있는 수제비만 먹어도 충분히 요기가 될 정도였다. 콩나물초무침과 김치는 기대 이상의 맛을 냈다. 콩나물초무침이 족발과 어울림이 좋다. 족발은 달짝지근한 과일맛과 향이 스며있고 맛이 은은하다. 장충동과 중국풍 향신료를 쓴 족발과 확연히 다르다. 돈암시장 입구의 오백집과 쌍벽을 이룬다. 오백집은 콩나물국이 예술인 곳이다. 곳곳에 족발 강자가 많은 세상이다.     


‘서대문족발’이 있는 미근동 동명은 이 지역에 있던 미동(尾洞) 또는 미정동(尾井洞)이라는 마을 이름의 ‘尾’자와 미나리 밭이 있어 근동(芹洞)이라 부르던 마을 이름의 ‘芹’자를 합성해서 만들었다. 이때 꼬리 ‘尾’자를 물결무늬 ‘渼’자로 바꿨다. 한자 풀이는 미나리가 물결치는 마을이 되기도 한다. 옛날엔 만초천이 흐르는 이 일대가 미나리 천지였다.       


비 오는 토요일엔 칼국수가 제맛 

   

20년 전 3000원 시절부터 다닌 ‘종로할머니국수’. 가격은 변했지만 맛을 예전 그대로다.

2차 표석 답사는 비가 추적이는 부처님 오신 날에 운현궁에서 출발했다. 필자가 2000년대 초반 뉴스통신사 뉴시스에서 근무할 때 사무실이 운현궁 건너편 경운빌딩이었다. 그래서 공간이 낯익고 친숙하다. 당시 가벼운 주머니의 기자가 자주 찾았던 식당이 종로 3가 익선동 초입에 있는 ‘종로할머니국수’와 ‘찬양집’이다. 불과 10미터 떨어진 두 곳 모두 칼국수전문점이지만 ‘종로할머니국수’는 멸치로 육수를 내고 ‘찬양집’은 홍합, 바지락 등 해물 육수다.      


당시 가난한 기자의 가벼운 주머니 탓에 한 끼 3000원에 사리까지 넉넉하게 주는 ‘종로할머니국수’를 자주 다녔다. 그때 각인된 맛의 추억으로 회사를 떠난 이후에도 기회만 되면 국숫집을 들렀다. 가격이 차츰 조금씩 오르더니 코로나19 이후 가파르게 인상돼 지금은 9000원까지 올랐다.      


과거엔 국수 한 그릇과 사리가 따로 제공되던 것이 이젠 아예 한 그릇으로 나오는 듯 양이 제법 많아졌다. 그래서 양이 적다 싶은 여성들은 한 그릇 다 비우기가 쉽지 않다. 국수 한 그릇과 만두를 주문해 나눠 먹는 요령이 필요하다. 고기만두와 김치만두가 제법 실하게 양도 많다,      


밀가루 칼국수가 식당 메뉴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부터다.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가루는 1955년 초등학교에 무상제공 되면서 시중에 널리 풀렸다. 박정희 정권의 혼분식 장려정책도 칼국수 소비를 늘리는 데 한몫했다.      


표석 답사는 앞으로 5회 더 진행된다. 오는 24일에는 4회차로 북촌 지역의 표석과 역사문화자원을 둘러볼 예정이다. 답사 후에는 어느 식당으로 갈지 벌써부터 사뭇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포음식문화거리 서쪽 최강자 ‘램랜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