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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영역이 확장되는 음식인문학

사회학ㆍ 민속학ㆍ역사학ㆍ인류학ㆍ기호학ㆍ정신분석학 등 영역과 융합

[유성호의 맛있는 동네 산책] 2018년 8월 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던 때 경남 통영에서 3박 4일을 머문 적이 있다. 이순신의 무훈을 기리는 한산대첩축제가 열리고 있는 시기였다. 저녁이면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하이에나처럼’ 통영의 뒷골목을 뒤졌다. 


강구안 문화마을 뒷골목에 들어서면 백석(1912~1996)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시를 담은 시화가 점포 빈 담벼락을 가득 채우고 있다. 통영에는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이 살았기 때문에 몇 차례 오갔다. 통영이란 시까지 남겼을 정도로 백석에게 이 도시는 남달랐다. 


백석의 시에는 음식에 관련된 것이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이 당시 평양냉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국수’라는 시다. 냉면 한 그릇을 놓고 그는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감탄해 마지않았지. 요즘 평양냉면을 표현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심심하다’는 심심하다의 북한 사투리다.


백석 시의 음식에 대해 소래섭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는 ‘백석 시에서 음식은 정신적 육체적 결핍을 보충하거나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음식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빛을 시간과 공간 속으로 확장시키는 어떤 존재로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기호론적 분석틀을 넘어서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음식을 단순히 배를 채우는 욕구의 도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상체질 이론을 만든 동무 이제마에 따르면 소화된 음식물은 상하로 운동하며 위로 올라간 기(氣)는 보고, 듣고, 말하는 형이상학의 에너지로, 아래로 내려간 기(氣)는 형이하학의 운동을 돕는 에너지가 된다. 


백석 시의 음식은 결핍을 보충하는 게 아니다

 

경남 통영시 강구안 뒷골목에 가면 백석의 시가 벽에 잔뜩 붙어 있다. 통영은 백석이 연모한 여인이 살았다. 


美 밀러스빌대 캐럴 M. 코니한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음식을 먹는 것은 성교처럼 정신과 물질을 포함한 외부적인 것들이 신체의 경계면을 지나 몸속으로 합체되는 경험‘이라고 그의 저서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적었다. 단순한 허기를 채우는 기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식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지나친 먹방에 대한 반동이다. 사회학, 민속학, 역사학, 인류학, 기호학, 정신분석학 분야로 음식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가 확장되고 있다. 


식재료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은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의 연구가 발군이다. 그는 <밥의 인문학>, <채소의 인문학> 등 음식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오래전부터 천착했다. 서구 영양학을 전공했지만 우리 음식문화와 역사, 과학성에 매료돼 한식 연구를 평생 업 삼았다 


충북 청원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가 가장 오랜 된 것으로 인정돼 우리나라가 벼농사의 시초가 된 시점에서 나온 <밥의 인문학>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녔다. 특히 우리 밥상문화에서 밥이 ‘주연상’(主演賞)을 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저서다. 


이후 밥과 함께 한식문화를 이끈 밥상의 주연급 조연은 채소와 나물이고 이에 대한 인문학적으로 접근한 자료가 없어서 <채소의 인문학>을 쓰게 됐다고 한다. 바야흐로 채소의 계절이 시작됐다. 정 교수는 “우리가 채소를 많이, 그리고 잘 먹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을 책에 담았다고 했다. 정 교수는 이후에 <고기의 인문학>을 내 음식인문학 서적 집필을 이어갔다.


채소와 나물 인문학적 접근자료 없어 집필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지은 <밥의 인문학>, <채소의 인문학> 표지.


영국 런던대 SOAS와 킹스 콜리지에서 음식학과 종교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불교음식학>을 펴낸 공만식 박사는 대중적이기보다는 아카데믹한 음식학, 이름보다 탄탄한 학문적 실력을 따지는 ‘음식학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포럼은 음식에 대한 호기심적 관심보다 근원과 바탕 공부에 매달린다. 


공 박사는 “음식인류학 혹은 음식학이란 명칭을 달고 이러저러한 음식관련 강좌들이 생겨나면서 저변 확대되고 있는 것은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백석의 시가 다닥다닥 붙은 통영의 뒷골목을 걷노라면 식욕이란 원초적 본능에 쉽게 사로잡히는 필자의 무식한 욕망이 부끄러운 대목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영하 교수도 음식인문학 분야에서 명망이 있다. 음식을 문화와 인문학, 역사학적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데 정평이 나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학과 문화인류학을 공부한 것이 음식공부에 큰 기본이 됐다. 대표적인 저서로 <음식인문학>과 <음식전쟁 문화전쟁>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식탁 위의 한국사> 등이 있다. 


주 교수는 식품영양학 상 요리의 대상이었던 음식을 학문적 관점을 통해 인문학과 결합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음식인문학은 음식의 생산과 소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로부터 최종 소비단계까지 행위에 나타난 철학, 역사, 사회적 기능과 상징, 국가 정책 등 매우 다양한 분야를 담고 있다. 


음식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음식학’ 저변 확대

 


공만식 박사의 <불교음식학>과 주영하 교수의 <음식인문학> 표지


필자도 한시를 뒤적이다가 조선시대 음식인문학자 한 사람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방랑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삿갓, 김립이다. 그가 남긴 ‘죽 한 그릇’이란 한시에 담긴 음식과 사람, 자연을 대하는 따뜻하고 초연한 시선을 곱씹으면 기름기 가득한 현대인의 식탁이 무색해진다. 


<죽 한 그릇(粥一器)> 


다리가 네 개인 소나무 밥상에 죽 한 그릇(四脚宋盤粥一器)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림자가 어른거리네(天光雲影共徘徊)

주인장 도리가 아니라고 무안해 하지 마오(主人莫道無顔色)

나는 원래 거꾸로 비치는 청산을 사랑하오(吾愛靑山倒水來) 


희멀건 죽 그릇에 쌀알이 얼마나 없었던지 건너편 청산이 비친다. 얻어먹는 주제에 쌀알 개수를 헤아리기보다 주인장의 부끄러운 마음을 헤아리는 정서가 심히 아름답다. 상다리는 네 개나 되는데 반상(盤上)에는 죽 그릇 달랑 하나가 주는 상대적 부족함을 하늘과 구름, 청산을 담아서 너끈히 채워버린다. 푸드 포르노가 만연한 세상에선 엄두 내지 못하는 초연함이다. 음식은 단순한 욕구를 채우는 기제가 아니다. 자연을 오롯이 담은 철학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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