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집·미진·청진옥 등 맛과 스토리 품은 노포 즐비
[유성호의 맛있는 동네 산책] 586세대에게 종로는 젊음의 성지 같은 곳이다. 물론 당시 신촌과 이대, 잠실 등도 나름의 지역세가 있었지만 서울의 중심부가 주는 상징성을 따라잡진 못했다. 종로는 80년 대 ‘핫플’이었고 지금은 홍대입구, 연남동 등 신생 핫플에 자리를 내주고 살짝 뒷방으로 물러앉은 듯 하지만 여전히 ‘썩어도 준치’급 동네다. 사무실이 밀집해 있고 서울 중심부 교통이 사통팔달이라서 약속 장소로 제격이다. 요즘은 신구세대가 조화롭게 종로에서 삶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모습이다.
종로는 세종로 사거리에서 종로3가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는 길이 2.8km, 너비 40m 도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성 천도를 하면서 종묘와 사직, 궁궐 다음으로 조성한 길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며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성의 주요 간선도로는 태조가 새 수도 천도 때 도시계획을 구상할 당시 형성됐다. 조선 건국 2년 만에 개경에서 한성으로 천도를 했지만 2대 정종은 왕자의 난 등 골육상쟁의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다시 수도를 개경으로 환도했고 3대 태종은 한성으로 재천도를 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엽전 던지기’(척전)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종로가 지금의 역사성을 가지게 된 것은 태종이 1412년부터 시전행랑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풍수에 의하면 주요 시설물 배치는 주례 고공기의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가 원칙이다. 이에 따라 경복궁 남쪽 전면에 행정관서, 좌측인 동쪽에 종묘, 우측인 서쪽에 사직단이 설치됐다. 다만 또 다른 풍수인 배산임수 때문에 전조후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대부분 궁궐이 도성 중앙보다는 북쪽에 치우쳐지었기 때문이다. 법궁인 경복궁의 경우 배산임수에 기반 해 백악산을 등에 지고 위치했다. 그래서 후면에 시장을 두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려웠다. 때문에 시장을 육조 다음인 종로에 뒀다. 시전도 한성 지형 때문에 동쪽 편에 치우쳐 발달했다.
지금의 광화문우체국 부근 종로 1가(혜정교)부터 종묘 앞까지 설치된 시전행랑은 한성 사람들의 생필품을 유통하고 정부가 필요로 하는 관수품을 조달하는 기능을 했다. 그중 육의전은 종로2가 네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종로 시전행랑에 이어 17세기 후반에는 남대문 밖 칠패시장, 18세기 중엽에는 동대문 쪽 배오개 중심의 이현시장이 발달하면서 3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사거리 스탠다드차타드은행 본점 자리는 조선시대 의금부 터다. 북쪽 길 건너 영풍문고 자리는 전옥서가 있던 자리다. 동학농민운동 주모로 잡혀 온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곳에 투옥된 후 교수형을 당했다. 모퉁이에 그의 동상이 놓여 있는 이유다. 전옥서는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미결수를 수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관원·양반 출신 범죄자는 의금부에서 담당했고 전옥서는 주로 상민 출신 범죄자를 수감했다. 의금부가 있던 지역명은 공평동으로 ‘공정하게 재판을 처리한다’는 뜻을 담았다. 의금부 앞에는 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신고받기 위한 신문고가 있었다.
시장과 감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위정자들은 일부러 시장 가까운 곳에 감옥을 두거나 죄인들의 형을 다스리는 공개 처형터로 활용했다. 시전행랑이 시작되는 혜정교 위에서는 탐관오리들에 대한 형 집행이 잦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칠패시장이 가까운 지금의 서소문역사공원에서도 참수형이 많았다. 특히 외국인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컸던 곳이라 종교적 역사성을 가진 공원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들 모두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통을 이용한 일종의 ‘전시효과’다.
종로는 이처럼 시전행랑과 사상(私商)의 발달로 조선시대부터 상업과 경제의 중심지였다. 특히 도성 내부와 외곽을 동서로 연결하는 주요 도로였고 동시에 사대문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한성, 경성, 서울이라는 시층을 지나면서 늘 ‘심장부’란 소리를 들었다. 1899년 우리나라 최초로 전차가 운행됐고 지하철1호선이 지나갔다.
종각 앞 잔디밭에는 지하철 수준점이 있다. 정식 이름은 ‘수도권 고속전철 수준점’이다. 알고 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 수준점은 서울의 모든 지하철 노선의 높이를 정하는 기준점으로 1970년 10월 30일 설치됐다. 이 기준에 따라 땅을 파야 서로 간섭하지 않고 땅 밑을 다닐 수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는 도로원표가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전국 각처에 이르는 방위와 거리가 표시돼 있는 돌덩이다. 지금은 교보문고 앞 ‘기념비전’ 한 귀퉁이에 들어와 있다. 광화문 네거리가 도로로 개발되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기념비전은 고종 즉위 40년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 세운 칭경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혜정교, 종각, 광화문 네거리 등이 있는 종로는 서울의 정치, 경제, 상업, 지표, 지하 등 일상과 공간에서 기점이자 중심이다. 시전의 발달은 음식의 발달과 맞물린다. 시장 상인과 장으로 보러 나오는 이들 모두 한 끼 내지 두 끼를 시장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먹거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종로통에 유명한 노포(老鋪)가 많은 이유다. 대로변은 시장이 차지했고 식당은 이면도로에 발달했다.
<열차집>은 3대째 이어오는 빈대떡 전문점이다. 1954년 지금의 교보빌딩 인근 세종로 뒷길 한옥가 골목길에서 창업주 안덕인 씨가 문을 열었다. 안 씨는 경기도 용인에서 서울로 행상을 다니던 상인이었다. 음식 솜씨가 있던 터라 처음에는 전쟁 중이던 1950년 광화문 일대에서 맷돌과 번철을 놓고 빈대떡을 팔았다.
휴전 후 1954년 장소를 종로소방서 부근 옛 중학천변으로 옮겨 자리 잡았다. 담벼락 밑 양쪽을 판자로 막아 자리를 편 모양이 기차간 같다고 해서 ‘기차집’이라고 불렀다. 1960년께 지금의 르미에르 빌딩에 자리를 잡으면서 사업자등록을 <열차집>으로 했다.
2대 우제인 씨 부부는 1976년 열차집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다 안 씨로부터 장사 노하우를 전수받아 가게를 인수했다. 현 운영주인 3대 윤상건 씨다. 2010년부터 종각사거리 제일은행 뒤(공평동)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비서관을 시켜 이 집 빈대떡을 가끔 사갔다고 한다.
모밀국수 전문점 <미진>은 여러모로 열차집과 닮았다. 창업 연도가 같은 1954년, 3대째 식당업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메밀의 함경도 사투리인 모밀 전문점이라고 한사코 이야기하는 곳이다. 고 안평순 씨가 광화문우체국이 마주보이는 종로통 대로변에 있다가 도로가 확장되면서 교보빌딩 후문 앞으로 옮겼다. 청진동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2010년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1층으로 이전했다. 열차집과 반대 행보다.
<미진>의 대표 메뉴인 모밀국수는 다랑어와 멸치, 다시마, 무 등을 넣고 가내비법으로 우려낸 육수에 메밀가루로 뽑아낸 면을 담아 내온다. 100% 메밀가루 면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찰기가 제법 느껴진다. 육수는 담백하지만 곱게 간 무와 대파, 고추냉이, 김 등을 어떤 비율로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다양해진다. 쯔유가 따로 주전자에 담겨 나온다. 무, 대파, 김은 테이블에 준비돼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단 쯔유에 아무것도 넣지 말고 모밀을 적셔 먹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간 무를 넣고 먹어보고 대파, 김 순으로 맛의 변화를 느껴보길 바란다. 김을 넣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쯔유 본연의 맛이 완전히 사라지고 너무 달달 해지는 단점이 있다.
간 무는 충분히 넣으면 좋을 듯하다. 메밀과 무는 상호보완이 좋은 식재료다. 메밀에는 살리실아민과 벤질아민이라는 독소 성분이 있다. 무는 이를 중화시켜 준다. 또 메밀은 성질이 차다. 그래서 소화가 쉽지 않다. 반면 무는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소화효소 성분까지 있어서 메밀을 보완한다.
개업 초기에는 메밀로 된 메뉴만을 취급했지만 지금은 메밀과 궁합이 맞는 음식을 사이드로 낸다. 저녁에 보쌈 손님도 제법 된다. 강원도 평창산 통메밀과 속메밀을 섞어 만든 메밀묵밥과 속을 꽉 채운 메밀전병도 인기 만점이다. 메밀전병의 경우 평양냉면집 제육과 같은 개념의 곁들임이다. 별관도 있지만 낮에는 11시 40분 정도부턴 대기를 각오해야 한다.
1937년 개업한 해장국 전문점 <청진옥>은 연식으로 따져도 종로 노포의 맏형이자 서민을 위한 맛으로도 ‘맛형’이다. 이 점포도 종로 피맛골 개발과정에서 르미에르 빌딩 1층에 자리 잡았다가 지금은 80여m 떨어진 길가로 이전했다. 청진옥은 백범 김구 선생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단골집이었다. 선지해장국이 유명한 곳이다. 원래는 양해장국이었는데 양을 푸짐하게 하기 위해 선지를 넣은 것이 시그니처 메뉴가 됐다.
원래는 이름 없이 길가에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다가 한동안은 평화옥이란 상호를 썼다. 한국전쟁 후 <청진옥>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5년부터 창업주의 손자인 최준용 씨가 3대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생전의 백범 김구 선생과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이 청진옥의 단골손님이었다.
<청진옥> 대표 메뉴인 해장국은 소내장과 우골 등 육수와 배추와 쪽파 같은 채수가 어우러진 국물을 24시간 정도 고아낸 다음 선지와 콩나물, 우거지 등을 집어넣어 만든다. 술을 한잔 한다고 하면 해장국 보다 안주국을 먹으라고 권한다.
586세대가 386이었을 때 종로는 젊음의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중장년이 이 공간을 더 많이 점유하고 있는 듯하다. 신구의 조화가 좋은 종로, 피맛길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있고 깊은 맛을 내는 노포가 여전히 언저리에 즐비하다. 피맛길 건너 세운상가 쪽 이면도로에도 종로맛골목이 따로 형성돼 있을 정도로 먹거리가 발달 된 곳이다. 종로는 대로변보다 이면도로를 걸을 때 재미를 더 느낄 수 있다. 어느 길이든 큰길보단 작은 골목길이 감정의 폭을 넓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