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노비 ‘반인’ 집단 거주지…혜화칼국수‧명륜손칼국수 등 유명
시월의 마지막 날 만추(晩秋)를 만끽하고 맛집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번에 발길을 옮긴 곳은 공자를 배향하는 성균관과 성균관 유생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도왔던 반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반촌 일대다.
마침 성균관의 망(望) 분향일이라서 의관을 정제한 유림들이 대성전 앞에서 치른 분향례를 볼 수 있었다. 또 운 좋게 대성전 내부에 봉안된 성리학의 선성선현(先聖先賢) 위패를 친견할 수 있었다. 분향례를 준비 중이던 박광영 의례부장이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여 이해를 도왔다. 대성전에는 오성, 공문 10철, 송조 6현, 해동(우리나라) 18현 등 모두 39분의 위패가 있다.
문선왕(공자의 존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등을 오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최치원, 정몽주, 송시열, 설총, 안유(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등 내로라하는 거물급 학자들이 봉안돼 있다.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봄, 가을에 한 번씩 석채례(釋菜禮)를 지낸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를 통틀어 문묘라고 하는 데, 이는 제례 공간이다.
문묘와 짝을 이룬 공간이 명륜당이다. 이와 함께 유생들이 기숙하던 동재, 서재 등 해설을 들으며 성균관 내부를 돌아보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가 아주 촘촘하게 성균관의 역사와 건물, 건축에 대해 설명한 자리였다.
설명은 성균관 유생에게 주는 식량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양현고(養賢庫)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표석 앞에서 끝났다. 조선시대에는 양현고 앞에 반수(泮水)라는 인공하천이 흘렀다. 지금은 복개돼 성균관대 정문을 지나는 도로가 됐지만 이 하천을 기준으로 성균관과 반촌으로 공간이 나뉜다.
반촌은 지금의 명륜동2‧3가, 그리고 4가 일부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한성 동북부지역은 민가가 거의 없었는데 유독 성균관 주변 반촌은 북적였다고 한다. 반촌에 사는 사람들은 반인(泮人)이라고 하는 데 원래 개성 사람들이다.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고려 학자 안향이 국학을 세우면서 노비 100명을 헌납했는데 이들이 성균관 공노비로 이어진 것이다.
반인과 반촌은 성균관의 별칭인 반궁(泮宮)에서 분화된 이름이다. 반인들의 임무는 문묘 수호와 유생 공궤다. 성균관의 제례를 지원하고 유생들 뒷바라지가 주요 사역이다.
성균관은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학이다. 고려시대 개경에 있다가 조선 건국 이후 1397년 한양 숭교방 지역으로 옮겨왔다. 그때 노비들도 따라 내려와 반촌을 이룬 것이다. 반촌은 반인들이 거주 공간이자 성균관 유생들이 밖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대명거리라는 지금의 혜화역 4번 출구에서부터 성균관대 정문에 이르는 길은 그때도 잘 발달된 상가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반촌에서는 유생들이 바둑과 같은 여가생활을 즐겼고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이들의 임시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반인은 노비 신분이었지만 성균관이란 특수공간의 노비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다. 조선시대는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는 우금(牛禁) 정책이 있었다. 성균관에서 올리는 제사와 유생들 식사를 위해 소고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성균관 내에 도사(屠肆)를 설치해 반인이 그 일을 담당하게 했다.
반인들은 당시 성균관 노역에 집중해야 했기에 농업, 수공업 등과 같은 생계유지형 일을 별도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정은 그들에게 남은 소고기와 부산물을 내다 팔아 이윤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다른 노비들과 마찬가지로 신공(身貢)을 바치는 역을 수행하는 노비지만 반인들에게만 주어진 경제적 특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성균관과의 ‘경제공동체’ 개념 때문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7세기 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성균관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땅인 학전(學田)의 상당 부분을 다른 권력기관에 빼앗기게 된다. 주요 재원이던 학전 수입이 줄어들게 되면서 성균관은 이를 반인들로부터 충당하게 된다.
18세가 도사가 현방(懸房‧다림방‧지금의 정육점)으로 변하면서 반인들은 한양 내 소고기 판매 독점권을 가진다. 이는 노비들 생계유지와 성균관 공역을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최대 23개까지 운영됐던 현방은 공물을 쌀로 통일시킨 대동법이 가져온 교환경제체제와 맞물려 호황을 누리게 된다. 교환경제는 시장을 만들었고 양반이 아닌 계층에서도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됐다. 이때 부자가 된 중인층이 양반 문화를 흉내 내며 소고기 수요를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조정은 소고기 판매 독점권을 주되 수익 일부를 성균관 재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명분은 우금정책 위반이다. 소 도살은 위법이기 때문에 사헌부·형조·한성부 등 세 사법기관에 벌금인 속전(贖錢)을 내게 했다. 속전은 성균관 운영 이외도 사법기관 소속 하위 공무원 월급과 경상 잡비로 쓰였다.
하루에 도살할 수 있는 소는 한 마리였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인계층이 늘면서 소고기 수요가 꾸준히 늘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게 되자 소고기 값은 뛰었을 것이고 지방과 소가죽 등 부산물은 우방전(牛肪廛)과 창전(昌廛)에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인들의 금고도 채워져 갔다.
반인과 성균관의 상호보완관계는 현방 운영을 통한 경제공동체 운명이었기 때문에 안전한 권력 울타리 안에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성균관이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던 것은 유생들 학비와 기숙사비, 식비, 지필묵 등이 모두 무료였기 때문이다.
현방 운영 수입 중 성균관 재정으로 충당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반인 몫이 됐다. 반인들이 현방마다 4명씩 전문 도살업자인 거모장(去毛匠)을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거모장은 ‘반인의 노예’라고 불릴 정도로 반인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다. 이는 노비인 반인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반증이다.
1894년 개화파에 의한 갑오개혁은 이들 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해 7월부터 12월까지 약 210건의 개혁안이 만들어졌고 공사노비(公私奴婢) 폐지도 그중 하나다. 돈은 있었지만 신분 한계 때문에 사회적으로 움츠려 있었던 이들은 국립 최고 교육기관에서 사역했던 관계로 후대 교육에 눈을 떴다.
이들이 돈을 모아 세운 학교가 숭정의숙이다. 소고기 판매상들이 모인 조합에서 1909년 설립 준비를 시작해 지금의 명륜동2가, 당시 사현동에 건물을 빌려 학교를 세우고 이듬해 개교했다. 도살하는 소 한 마리 당 10전 씩, 설렁탕 집에서 매일 5전 씩 기부해 재원을 만들었다. 여러 차례 개명을 한 끝에 지금의 혜화초등학교로 자리 잡았다. 못 배워서 멸시받고 천대받았던 노비 출신 부모 세대의 열정과 염원의 결과다,
한편 소를 자유롭게 도살할 수 있었던 반인들이 모여 산 반촌에는 소고기는 물론 소 부산물이 풍부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소뼈인 사골일 테고 이를 이용한 음식점이 주변에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숭정의숙을 지으면서 설렁탕집에서 매일 5전씩 기부를 받은 것을 보면 이들 반인들이 현방 이외에 소 부산물을 이용해 식당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당시 성균관 유생 상당수가 경상북도 안동지역을 정점으로 하는 권문세도가 자제였던 탓에 그들이 먹고 자랐던 안동국시에 대한 ‘니즈’가 결합해 사골육수를 베이스로 한 국수집들이 꽤나 생겨나지 않았을까 추론된다. 물론 명륜손칼국수와 같이 설렁탕과 칼국수를 한집에서 팔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필자는 명륜동과 혜화동 일대에는 칼국수 집이 유독 많은 것을 주목하고 있다. 명륜손칼국수를 비롯해 혜화칼국수, 국시집, 성북동집, 일송손칼국수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다. 한성대입구역부터 심우장이 있는 곳까지 국수와 수제비, 쌀국수, 멸치국수 등 이런저런 점포가 27개나 있다. 그래서 성북동 국수거리라고 이름 붙었다.
성균관 답사를 마치고 들른 곳은 몇 번 찾았다가 대기줄 때문에 발길을 돌렸던 혜화칼국수다. 명륜손칼국수를 가려다 계획을 변경했다. 어차피 명륜손칼국수도 대기를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동네 칼국수 노포의 인기가 대단하다.
혜화칼국수는 혜화로터리서 재능교육 쪽으로 조금만 오르면 왼편에 자리 잡고 있다. 40여 년 된 ‘경상도식’ 전통 칼국수다. 경상도식은 사골육수를 쓰는 안동식이란 의미와 같다. 멸치육수 베이스 칼국수 집이 김치 겉절이를 내놓는 반면 이 곳에서는 신김치를 제공한다. 살짝 익은 김치의 신맛이 절묘하다.
예상 밖으로 사골육수 농도가 옅었다. 그래서 사골 특유의 고소함을 느끼진 못했다. 거꾸로 너무 기름지지 않아 담백하고 깔끔한 맛은 있었다. 고추를 삭혀 만든 다진 양념이 사골 기름 맛을 잘 잡아준다. 메뉴 중에 독특하게 생선튀김이 있다. 칼국수집에서 생선 전(煎)이 아닌 튀김이라니.
메뉴를 받아보니 실제로 흰살 생선을 튀김옷을 입혀 튀긴 것이다. 저잣거리 말로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고 했는데, 하물며 흰살 생선이다 보니 부드럽고 고소하다. 칼국수 이외 사이드메뉴로 생선튀김이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한다.
국내산 육우로 만든 소고기 수육 역시 쫀득한 사태 부분을 얇게 썰어 내온다. 전반적으로 명륜손칼국수와 차별화가 많은 곳이다. 두 칼국수집의 개성이 뚜렷해 라이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혜화칼국수와 명륜손칼국수가 비슷한 점은 있다면 겉절이가 아닌 숙성 김치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가 많다. 사골 육수를 육안으로 봐도 혜화와 달리 명륜은 뽀얗고 농후해 보인다.
칼국수 이외 사이드로 나오는 수육도 명륜은 양지부위를 촉촉한 상태로 찢어 나온다. 양지 수육은 식기 전에 빨리 먹어야 하는데 식으면서 마르기 시작하면 퍼석해진다. 생선은 한쪽 포를 자르지 않고 온전히 커다랗게 전으로 부친다. 혜화는 바싹불고기와 녹두빈대떡을 사이드 메뉴로, 명륜은 설렁탕을 주식 메뉴로 제공하고 있다. 두 집이 같은 거라곤 문어숙회 정도로 지역에서 팽팽하게 칼국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