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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남영동 올레길 끝에서 만난 맛집

생태탕전문 ‘맛드림’ㆍ모둠스테이크 전문 '황해'는 폐업

짙어가는 가을을 놓치기 아까워 일요일에도 길을 나섰다. 서울의 한가운데 남산은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나무,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 가는 벚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남산에는 붉은 단풍보다 더 붉었던 일제하 항일의 길이 여러 갈래 나있다. 현대사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길이 겹치는 곳이다.       


지난 25일 청명한 하늘에 가을볕이 따갑게 부서지는 날, 독립, 민주, 인권과 만나는 ‘남산-남영동 올레길’을 걸었다. 이번 답사는 민주인권기념관이 기획한 행사로 홈페이지를 통해 개인이나 단체로 참여할 수 있다. 역사문화 인문동아리 문화지평 회원 10여 명과 함께 한 이번 올레길 해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해설사인 한종수 씨가 맡았다.      


남산한옥마을에서 시작한 올레길 답사는 서울시청 남산1별관과 통감부 터를 거쳐 후암동을 지나 남영동 민주인권센터까지 3시간가량 이어졌다. 남산한옥마을 자리는 의병진압의 전초기지였던 조선헌병대가 있던 자리다. 이곳은 해방 후 수도경비사령부가 들어섰고 일명 ‘필동 육군본부’로 불렸다고 한다.      


1979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 시 반대파인 장태환 수방사령관이 버티고 있었지만 반란세력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 수방사령관이 노태우로 바뀌면서 군사정권의 방배 노릇을 했다. 1990년대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이 시작되면서 수방사는 남태령으로 이전하고 서울 시내 개발로 철거 위기에 처했던 한옥을 옮겨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과 반인권을 폭로하는 남산~남영동 올레‘ 

 ①소릿길 터널 ②서울시청 남산1별관(옛 중정 제5별관) ③서울종합방제센터(옛 중정 지하 벙커) ④국치길 박석 ⑤백범공원(옛 조선신궁 터)에 있는 백범 동상        

단풍이 깊어가는 남산과 남영동 올레에서 만난 독립, 항일, 민주, 인권의 흔적들. 켜켜이 쌓인 흔적 속에서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미래를 향한 마음을 다잡는 시간. 


남산한옥마을을 거쳐 남산을 오르면 ‘소릿길’이란 터널을 지나 서울시청 남산1별관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모두 중앙정보부 시절 제5별관으로 쓰였던 곳이다. 이곳 지하2층에서는 고문과 강제자백 강요가 횡행했고 조작을 통해 간첩을 만들어 냈다. 남산유스호스텔은 중정 시대를 마감하고 국가안전기획부가 들어서면서 본부 건물로 지어졌다. 남산유스호스텔 앞 서울종합방제센터는 과거 유사시 대통령이 지휘할 수 있도록 지하벙커가 있었다.      

민주주의를 탄압하던 야만의 공간을 지나면 일제시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다스린 우두머리가 살았던 통감관저 터가 나온다. 통감관저는 해방 후 국립박물관과 연합참모본부(합동참모본부 전신)로 쓰이다가 철거돼 지금은 신영복 선생이 쓴 글씨로 표석이 남아 있다. 통감관저 터에서 더 높이 오르면 서울애니메이션 센터가 나오는데, 과거 통감부와 총독부가 있던 터다.  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원 김익상의 의거 터를 나타내는 표석이 나란히 있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볼 수 없다.     


노기신사 터, 경성신사 터는 지금의 리라초등학교, 숭의여자대학이 들어섰고 조선신궁 터는 백범광장으로 조성했다. 백범광장을 지나면 서울로7017쪽으로 가거나 후암동을 거쳐 민주인권센터로 가는 답사 분깃점이 나오는데. 일행은 적산가옥과 당시 골목의 원형을 볼 수 있는 후암동 길을 택했다.      


남산에서 후암시장 쪽으로 흘렀던 하천은 물길을 내고 주변에 줄지어 주택을 형성했다. 후암동 길에는 자연스레 구부러진 물길을 복개한 도로를 만날 수 있고 온전히 남은 몇 채의 적산가옥과 핫플레이스 척도인 맛집이 서서히 늘어가고 있었다. 이 지역은 용산 미군기지가 공원으로 조성되면 자연스레 관광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답사팀은 어느새 남영동 민주인권센터에 다다랐다. 민주인권센터 옆 건물은 롯데제과 본사가 있던 자리로 지금은 롯데리아, 엔젤리너스, 티지아이프라이데이 등 롯데그룹 계열 식품외식사업부들이 모여 있다. 근처에는 오리온제과 공장도 있는데, 모두 일제 때 일본 군영에 과자류를 납품하던 공장들이 적산으로 불하되면서 국산 과자 산업으로 이어진 결과다.      


시민 품으로 돌아온 민주인권센터

치안본부 대공분실, 경찰청 보안분실, 경찰청 인권센터로 이름과 기능이 바뀌면서 존속했던 것이 지금은 민주인권센터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행안부로부터 위탁 관리하고 있다.

민주인권센터는 1976년 10월 내무부장관 김치열이 발주해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졌다. 1983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5층 건물이던 것을 7층으로 증축하고 1985년 김근태 의장 고문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987년에는 6월 민주항쟁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치사한 곳이다. 1991년 경창청 보안분실에서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기능과 명칭이 변했다가 국민청원을 통해 2018년부터 민주인권센터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위탁관리하고 있다.     


일본군헌병대, 수도방위사령부, 통감부, 한양공원, 왜성대, 조선총독부, 노기신사, 경성신사, 조선신궁, 용산미군기지(청나라와 왜군 주둔지) 등 수 세기 동안 한 번도 우리 땅이라고 마음 놓고 부를 수 없었던 치욕과 금단의 땅 속에 박혀 있는 강점과 이에 맞서는 독립, 항일의 길. 현대사에서는 민주와 인권이 처절하게 유린됐던 억압의 공간이 공존하는 남산과 남영동 올레길. 한번쯤 꼭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걸어보길 권하고 싶은 길이다.  이 길은 과거 몇 차례 걸었던 길이다. 그때마다 다른 해설사의 새로운 해설과 역사관이 미묘한 재미와 정보의 축적을 더했다. 이번에도 속도감 있는 진행과 명료한 해설로 제법 긴 거리의 답사를 유익하고 뜻있게 보냈다.      


오랜만에 찾은 ‘황해’는 폐업 역사 속으로

      

지난 2016년 이후 1년에 한 두 차례 찾았던 모둠 스테이크, 부대찌개 전문 노포 황해가 폐업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답사를 마치고 향한 곳은 부대찌개와 모둠스테이크 전문점인 ‘황해’다. 멀리서 바라본 건물 외벽이 이상했다. 간판이 모두 사라지고 다가갈수록 어둑한 조명, 휑하니 뜯겨 나간 2층 창문 때문에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창을 통해 들여다본 내부는 모두 철거된 상태였다.    

      

1973년 개업해 남영동 스테이크 골목을 형성하는 데 초석을 놨던 황해가 4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T.본 스테이크’란 간판도, 황해란 간판도 모두 철거된 상태다. 2016년 처음 만났던 사장 정순자 할머니는 “이 동네 부대찌개, 스테이크 원조는 우리 집”이라며 큰 자부심을 보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황해 대표 메뉴는 스테이크 모둠으로 소고기와 햄, 베이컨을 넣고 특제소스로 볶아 맛을 낸다. 라면을 함께 넣어 내오는 부대찌개도 손님들이 즐겨 찾는 인기 메뉴다. 한때 하루에 1000여 명의 손님들이 찾았다고 하니 문전성시가 눈에 선하다. 남영동 일대 스테이크 거리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대중음식점으로 식문화사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높아 지난 2014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새로운 선택 생태탕 전문 ‘맛드림’을 만난 기쁨

   

생태매운탕과 내장탕 전문점 ‘맛드림’. 전북 김제 출신 주인의 넉넉한 인심과 손맛, 밥맛 등 삼미(三味)가 뛰어난 곳이다.

폐업한 황해를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마침 일요일이라 식당이 문을 연 곳이 많지 않았다. 추어탕과 꼬막무침이 일품인 ‘남원원추어탕’도 문을 닫았는데 마침 건너편에 LED 조명이 반짝이는 식당을 발견했다. 문을 빠끔히 열고 영업을 하시냐고 물었더니 그러하단다. 일행 9명이 한 테이블 당 세 명씩 사회적 거리를 두면서 앉아 메인 메뉴를 시켰다.      


이 식당은 생태매운탕 전문점 ‘맛드림’(대표 박춘자)이란 곳으로 다른 메뉴도 있지만 현장서 주문은 생태매운탕과 내장탕 등 탕 종류만 가능하다. 등심, 주물럭, 차돌박이, 삼겹살 등 구이고기류는 사전예약을 해야 맛볼 수 있다. 사이드 메뉴로는 동태전과 계란말이가 추가 주문이 가능하다.      


전북 김제 출신 손맛 좋아 보이는 박 사장은 이곳에서 맛드림을 문연 지 5년 차, 식당을 한지는 20여 년 차 베테랑이다. 주방서 1차로 한불 끓인 생태탕을 누런 양은 냄비에 한가득 담고 미나리를 한 움큼 크게 쥐어 올리고 내온다. 조미료 대신 각종 식재료로 육수를 내서 국물이 시원할 것이라며 자랑한다.      


국물 맛을 보니 박 사장의 호언이 허언이 아니었다. 아주 웅숭깊진 않지만 시원한 국물 맛이 입맛에 맞았다. 무엇보다 짜고 맵지 않아 자극적인 음식을 싫어하는 식객들도 좋아할 만한 맛이다. 칼칼한 시원함을 원한다면 청양고추 하나 정도 썰어 넣으면 좋을 성싶다.     


햅쌀이 한창 나을 때라 운 좋게 도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동진이란 품종의 햅쌀을 맛볼 수 있었는데, 그 맛이 가히 환상적이다. 기본적으로 구수한 향미가 좋은 쌀 품종이기도 하지만 압력솥으로 잘 지어낸 밥맛이 코끝과 혀를 즐겁게 한다. 박 사장의 고향인 김제는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벼논이 발달한 곡창지대로 ‘맛있는 밥맛’을 추구하는 이유가 대략 짐작된다.        


박 사장은 “밥맛이 좋아서 일부러 두 그릇씩 잡숫고 가시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식당 저 식당 전전하다가 불가피하게 선택한 식당이 신선한 맛을 제공했을 때 기쁨은 검증된 식당에서 예상된 맛을 접했을 때보다 배가 된다. 맛드림이 그런 곳이다. 


남산에 역사가 덧쌓이듯 남영동 스테이크 거리의 역사도 켜켜이 쌓인다. 황해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고 황해는 과거로 남는다. 그렇게 은성, 털보네 등 스테이크 골목의 맹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 이 거리는 과연 어떻게 바뀔까. 필자는 변화보다는 가업 승계를 통해 이 거리가 계속 스테이크 거리로 남았으면 싶다. 생태매운탕이 시원한 맛드림도 그들과 이 거리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는 식당으로 오래 남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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