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 청국장 ‘사직골’ 구수한 장맛 애달픈 심사 날려
한 세대 넘게 남의 손에 의해 지배를 받은 식민(植民)의 역사를 거쳐 온 우리 땅의 시층(時層)은 남다르다. 묘하게도 그 시기가 봉건시대에서 개항에 따른 근대화와 맞물리면서 정신세계는 물론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에도 복잡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한 세대 동안 일제는 우리 정신세계를 집요하게 유린했고 해방이 된 지 두 세대하고도 반인 75년이 지났지만 식민의 찌꺼기가 여전히 뇌 속에 남아 불쑥불쑥 언행으로 나타나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만큼 식민의 역사는 잔인하고 걷어내기 힘든 고황지질(膏肓之疾) 같은 존재다.
스포츠에서 한일전은 그래서 여전히 항일전처럼 치러야 하고 스포츠 정신보다 승부에 집착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식민의 통증이 쉽게 사라지긴 어렵겠지만 이를 극복할 때 양국 스포츠맨들은 진정한 스포츠맨십으로 승부를 겨루고 승자를 축하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제 강점기 서울의 지도는 많이 변했다. 특히 서구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건축이 서울 시내 곳곳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작게는 개인주택부터 크게는 총독부 등 공공기관, 신사, 학교 등 일본화된 제국주의 건축이 도심에 들어섰다.
식민 수탈국은 자국 국민을 식민지에 이식한 것만 아니라 피식민국의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모두를 파괴하고 지운 곳을 자국 영토화 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궁궐을 훼철했고 그것도 모자라 부재(部材)를 제멋대로 옮겨서 마구잡이로 사용했다.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이번 칼럼에서는 서울 한복판인 을지로 입구 롯데호텔이 들어선 부지에서 벌어진 일들을 정리해 본다. 소공동 롯데호텔 주차장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옛터’ 표지석이 서 있다. 길가에 노출돼 있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 자리는 일제가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지은 곳이다. 원래는 석고단이 있었다. 석고단이란 1902년 고종황제의 칭경기념(稱慶記念)을 위해 건립된 시설이다. 석고단은 석고와 석고가 놓인 석고전, 그리고 대문인 광선문으로 이뤄졌다. 고종이 축하받을 칭경이란 어좌에 앉은 지 40년에다 60세를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51살 되던 해에 부르는 망육순(望六旬)이 겹친 일이다.
그때 지어진 것이 또 하나 있는 데 광화문 교보빌딩 모퉁이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기념비전이다. 이들 칭경기념물은 나라서 세운 게 아니고 아첨쟁이들의 결과물이다. 고종의 양대 기념일을 기리는 기념물을 만든다는 미명 하에 패가 갈려 아첨꾼들이 ‘충성경쟁’을 벌였다.
기념비전은 조야송축소라는 관변단체에서 현직 관리들을 대상으로 반강제 모금을 통해 모금한 돈으로 세웠다. 이들은 기념비를 세우고 보호각인 기념비전을 만들었다. 전(殿)은 가장 높은 격의 건물에 붙는 것으로 뒤를 이어 당(堂), 합(閤), 각(閣), 제(齋), 헌(軒), 루(樓), 정(亭) 순이다.
이때 설립에 끼지 못한 무리들이 만든 단체가 송성건의소인데 반관반민 형태를 띠었다. 송성건의소란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임’ 고종의 중흥공덕을 비석에 새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관리들에게 비용을 강제로 모금했고 특별한 비석을 만들고자 했는데, 바로 돌북(석고)이다.
탁지부 대신 김성근이 석고를 제작하고 조병부를 송성건의소 의장, 이유승을 부의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유승은 부의장 직을 내려놓으면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왕의 업적은 오로지 시경(詩經)과 사전(史傳) 등 서책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지 돌에 새기진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결국 석고에 새기는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석고단 자리에 일제는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지었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이 됐다. 일제 패망 후 한국인 사서들은 일제가 장서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지켰다. 일본인 사서와 미군정이 협의해 모든 장서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승계됐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은 총독부도서관 연혁까진 승계하지 않았다. 국립중앙도서관 개관일은 1945년 10월이다. 다만 옛터만큼은 표식을 통해 ‘장소성’은 연계하겠다는 취지로 표지석을 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일제는 석고를 보호하던 석고각을 1935년 대한제국 현충시설 위에 지어진 이토 히로부미 추모사찰인 박문사(博文寺, 현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로 옮겨 종각으로 사용했다. 석고는 1936년 석고전과 인접해 있던 원구단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처음 석고를 설치할 때는 눕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세워 놨다. 그 덕에 석고 옆에 수 놓인 수려한 용 조각을 볼 수 있다.
전(殿)에서 박문사 종을 보호하는 각(閣)으로 격을 떨어트린 일제는 이를 다시 창경궁을 훼철하고 만든 창경원으로 이건 해 야외무대로 사용했다. 고종 황제의 권위를 무참히 짓밟으려는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석고각은 창경궁 복원계획에 따라 1984년에 철거됐다. 문제는 허물고 남아 있어야 할 부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어질 당시만 해도 외관이 수려해서 국보급 건축물이란 소리를 들었는데 부재 존재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당시 문화재 관리 수준을 엿보는 듯해 입맛이 씁쓸하다.
석고단 정문이던 광선문은 그 자리에 들어 선 조선총독부도서관 정문이 됐다가 일제가 남산에 지은 절인 동본원사 경성별원을 옮겨져 대문으로 사용됐다. 동본원사는 지금의 대한적십자사 본부가 있는 곳이다.
광선문은 이후 성균관대 정문(1964~76)을 거치면서 이 또한 해체하면서 부재가 사라졌다. 당시 주춧돌만 현재 성균관대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커다란 건물채의 부재가 이렇게 손쉽게 사라지는 모습이 아쉽기만 하다.
원구단 일부에 조선호텔을 세운 일제는 석고단 근저에 반도호텔을 짓는다. 반도호텔은 8층 111실 규모로 당시 동양에서 4번째로 규모가 큰 호텔이라고 홍보했다. 반도호텔은 1930년대 일본 내에서 지어졌던 서유럽풍의 몸체에 동양적 머리 형태로 대동아공영권을 재창하는 의도를 표현했던 건물이다. 호텔 건립에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질소비료 사장인 노구치 시다가후(野口遵)가 조선호텔에 갔다가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쫓겨나자 분풀이 차원에서 반도호텔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노구치는 이 일을 있은 후 당시 황금정(현 을지로) 1정목 18번지 땅을 매입했고 5층짜리 조선호텔을 훨씬 능가하는 11층짜리를 올렸다. 조선호텔의 북쪽 조망을 완전히 가로막는 ‘복수’였다.
이런 일화를 사실로 뒷받침하는 것 중 하나가 호텔 개발 초기단계 명칭이다. 반도호텔이 아닌 신조선호텔이란 이름을 붙일까도 했을 정도로 조선호텔에 대한 반발이 컸다. 노구치는 호텔을 짓고 조선호텔 최고층과 같은 5층에 자신의 사무실을 뒀다고 한다. 졸부의 갑질이라고 치부하기엔 집요하고 뾰족하다.
반도호텔은 해방 후 1949년 조선호텔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될 때 정부 측에서 미국 원조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증여해 미 대사관으로 사용되게 된다. 대사관으로 사용한 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 반도호텔은 길 건너 대관정 자리에 지어진 삼정(三井)빌딩과 교환 형식으로 우리 정부에 다시 이양된다.
우리 정부는 이를 중앙청으로 사용하고자 논의도 했지만 결국 관광호텔과 사무실로 사용하다 1960년 일반인에게도 개방했다. 반도호텔이 매각되기 1년 전인 1973년 롯데그룹이 호텔 사업을 위해 신청한 외국인 투자 및 차관 인가신청서가 경제기획원 외자도입심의위원회 의결로 통과됐다.
롯데호텔은 일본롯데로부터 3000만 달러의 투자와 1800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받아 반도호텔, 국립중앙도서관 일대를 사들였다. 또 당시 서울은행 소유지와 그곳에 위치한 동국제강 5층 건물,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인 신춘호 롯데공업 사장이 소유하던 반도호텔서편 대지와 대형 중식당 아서원, 아케이드 부지 중 반도호텔 후면 일부, 반도호텔과 산업은행 사이 일반 민간소유지 등을 정부의 제도적 지원 아래 매입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서울 도심에서 확보하기 힘든 거대한 단일 필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호텔 사업을 위해 만반의 준비가 끝난 롯데는 반도호텔은 1974년 6월 공개경쟁입찰에 단독응찰 한 호텔롯데가 41억9800만 원에 낙찰받았다. 국립중앙도서관 또한 일반 공개경쟁입찰 형식으로 롯데가 8억3600만원에 매입했다. 도서관은 정부가 남산어린이회관을 8억4600만원에 인수한 후 이전 개관했다.
1974년 국립중앙도서관은 소공동 시대를 마감하고 ‘어울리지 않게’ 남산으로 이전했다. 롯데는 국립중앙도서관 부지에 롯데백화점 주차장을 지었다. 결국 석고전 터에 주차장을 앉힌 꼴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는 이곳에 표지석을 하나 더 세워야 맞지 싶다.
을지로 통에 서면 가슴이 답답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파렴치함과 식민의 억울함 때문이다. 그럴 때 심사를 녹여줄 맛집이 다행히 소공로 초입에 있다. 원래는 사직공원 근처 사직동 주민센터 앞에 있다가 이사 온 ‘사직골’이다. 지금도 간판에는 사직골이란 큼지막한 글자 옆에 작게나마 사직분식이라고 적어 놨다.
사직분식 시절보다는 청국장 콤콤함이 덜하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대기가 걸리는 집이다. 청국장 냄새는 어느 날부터 도시로부터 외면받는 이취(異臭)가 됐다. 구수함은 더 이상 다수의 기호가 아닌 것이 된 것이다.
안국동 골목 한옥채에 자리 잡은 ‘별궁식당’도 청국장으로 유명하지만 어느 날부터 냄새 없는 장을 쓴다. 이 집도 과거에는 구수한 장 냄새를 꽤나 풍겼다고 한다. 그러나 냄새가 사라진 이유는 다름 아닌 이웃의 민원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냄새를 뺀 청국장을 사용하게 됐고 다행히도 그것을 선호하는 손님 층이 생겨났다. 시내에서 청국장 냄새를 진하게 맡을 수 있는 곳으로는 찬으로 청국장을 내주는 당산역에 있는 ‘이조보쌈’이 있다.
사직골에서는 칼칼한 두부찌개와 ‘단짠’이 아닌 ‘맵달’의 제육볶음도 맛볼 수 있다. 지리적 특성상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게 특징이다. 도로가 좁아 대기줄 서는 불편함은 있지만 점포 입장에서는 길가에 손님을 세워 놓는 것 만한 효과 좋은 마케팅이 없다. 그런 면에서 사직동을 떠나 천혜의 입지를 자랑하는 현 자리로 이전한 것은 잘한 결정이 아닐까 싶다.
청국장의 오묘한 맛은 장류 특유의 소금에서 오는 짠맛, 탄수화물과 단백질 가수분해 산물인 당의 단맛과 아미노산의 구수한 맛 등이 어우러진 산물이다. 그래선지 어려서 먹었던 맛의 기억이 가한 음식 중 하나다. 강렬한 냄새의 청국장을 찾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혀가 느끼고 뇌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맛을 나이가 들어서도 찾는 것이다.
청국장은 콩 발효식품 중 2~3일이라는 가장 짧은 기일에 완성할 수 있으면서 풍미가 특이하고 영양이나 경제적 측면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콩 섭취방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유중림의 ‘중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년)에 따르면 ‘대두를 잘 씻어 삶아서 고석(볏짚)에 싸서 따뜻하게 3일간을 두면 생진(生紾)이 난다’고 기록했다.
홍만선 ‘산림경제(山林經濟)’(1715년)에서는 전국장 이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돼 있다. 한시가 급한 전시(戰時)에 부식으로 단시간 제조가능해 전국장(戰國醬), 청나라에서 왔다고 청국장(淸國醬)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