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영혼을 담갔다.
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은 푸드랜드에서 산 새우튀김과 라면으로 때웠다.
소화도 시킬 겸 산책에 나섰다.
하와이에도 고양이는 있었다.
하지만 닭 대신 쓰레기통을 잡아먹었다.
조명이 근사하지만 내 것이 아니다.
이런 데서 느끼는 화려함은 나를 밀어낸다.
밤늦게 리조트 정문 근처에 주차된 오래된 기아 차는, 여기서 일하는 야간 당직자의 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국산차를 봐서 반갑다는 생각은 1도 들지 않았다.
수영장 내부에 조명이 들어와 예쁜 톤으로 물들었지만, 환상적인 저곳에 몸을 담그는 관광객은 없었다.
'나라도 뛰어들까?'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귀찮아서 포기했다.
물에 젖은 비키니 차림으로 로비를 드나들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백인도 있었기 때문에 즉흥적인 물놀이는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역시 귀찮았다.
나이가 들면 많은 것들이 귀찮아져, 나 같으면 귀찮아서 안 하게 될 일까지 해버리는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수면제를 준비했다.
푸드랜드에서 아내가 맥주를 못 사서, 리조트 안에 있는 편의점을 이용했다.
안주는 치토스 같이 생긴 과자.
병따개를 달라고 했더니 40분쯤 걸려서 받은 것 같다.
대단히 친절한 터틀 베이 리조트였다.
이렇게 압도적인 친절은 노스 쇼어 지역에선 리조트가 자기네 하나밖에 없다는 우월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에서 독점은 해악이고, 과점은 독점에 버금가는 해악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과점 상태의 시장에 갇혀 호구 노릇 하기 바쁘다.
현대기아차의 해악은 말할 것도 없고, 통신 3사가 기본료 폐지를 요구하는 정부 입장에 반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본료'라는 건 사용하지 않아도 내야 하는 돈이다.
SK텔레콤, KT, LG텔레콤이 폭리를 취해온 근간이다.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들은 무노동이면 무임금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소비자가, 사용하지 않은 서비스에 대해선 내지 않겠다고 하자, 그건 또 아니라고 발광한다.
5시 30분,
아내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탁자에 탁상시계가 있고, 지난밤 알람을 세팅했지만 울리지 않았다.
터틀 베이 리조트 최고닭!
30분만 더 자는 것으로 악마와 타협을 본 뒤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이번엔 리조트의 동쪽 해변으로 나갔다.
초승달이 떠 있었고, 해변은 볼품없었다.
동쪽 해변에서 바라본 터틀 베이 리조트.
35mm f/1.8G 단렌즈로 찍은 바다 사진은 여기에 올릴 수준도 못 됐다.
거북이는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거기가 어느 해변인지는 몰라도 여기가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일출은 볼 수 없었다.
단렌즈는 해안선을 예쁘게 뽑아내지 못했다.
바람만 실컷 맞고 들어온 기분.
백인 가족이 해변을 거닐었고, 배낭을 멘 백인 남성 하나가 해변 가운데 돌출된 바위 끝까지 갔다.
따라갈까 하다 위험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번역하자면 귀찮아서) 포기했다.
삼각대에서 카메라를 떼어내자 바람에 넘어갔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헤드의 잠금 손잡이 일부가 깨져 있었다.
사진 하는 지인이, 카메라 삼각대도 좋은 걸 사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잤다.
어제보다 잘 찍겠단 각오가 수포로 돌아갔지만 씩씩하게 잘 잤다.
10시쯤 일어나 씻고, 어제 산 도넛을 먹은 뒤 닛산 무라노에 올랐다.
목적지는 미국 2대 비치 중 하나라는 카일루아 비치.
웅장한 산의 양감이 특이하다.
암벽 등반가들에겐 꿈의 놀이터가 아닐까.
중국인 모자섬을 지나
우리가 올라왔던 도로를 그대로 내려갔다.
밸리 오브 더 템플스 기념 공원 인근에서
공사 현장을 만났다.
동부 해안 도로를 달리면서 공사 현장과 종종 마주치긴 했지만 이번 건 규모가 컸다.
일부 구간의 차선 두 개를 몽땅 먹어치워 갓길로 다니게 했다.
하필이면 우리 바로 앞에서 잘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내가 세어봤는데 100대씩 보내더라고.
왜 세어봤는지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어 달릴 때 나는 창 밖으로 팔을 뻗어 '알로하' 손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정식 명칭은 샤카 사인이라고.
나를 본 운전자들은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내는 카일루아 비치 파크보다 라니카이 비치를 먼저 가야 한다고 했다.
카일루아는 비치 파크여서 샤워 시설이 있고 라니카이는 비치여서 샤워 시설이 없으니 샤워 시설이 없는 라니카이 비치에서 수영을 즐긴 뒤 카일루아로 이동해 거기서 최종적으로 샤워를 하면 된다는 거였다.
우리 집 공식 동물은 벌꿀오소리다.
문빠들이 문꿀오소리를 차용해 깜짝 놀랐는데, 우리는 녀석을 몇 해 전 우연히 시청한 다큐에서 발견했다.
다큐멘터리 화면을 캡처한 저 모습이 우리 가족을 감동시킨 장면인데, 코브라 같은 독사를 뜯어먹은 뒤 독에 취해 자빠져 자는 장면이다.
스스로 해독하는 기능이 있어 몇 시간 잔 뒤 깨어나, 나머지 독사를 뜯어먹는다고.
사자한테 붙들려도 단단한 가죽 때문에 먹기를 포기하고 간다는, 작지만 질긴 생존력의 대명사다.
나는 우리 가족이 자본주의라는 아프리카에서 벌꿀오소리처럼 우리 "나름의 방식"대로 해쳐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이 녀석을 공식 동물로 지정했다.
하지만 진짜 못생겼다. 생긴 거에는 정말 정 안 간다.
우리 집 공식 정신은 큐비즘.
입체적으로 생각하자.
라니카이를 먼저 들러야 한다는 아내의 판단은 입체적으로 훌륭한 선택이었다.
라니카이 비치는 닛산 무라노에 매립된 내비게이션의 스펠 네임에 등록된 주소가 아니었다.
이 차를 빌려준 알라모 렌터카가 제공한 A4용지에 안내된 도로명을 입력하자 내비게이션이 작동했다.
한산한 주택가 도로에 들어선 나는 눈치껏 갓길에 주차했다.
이 길 너머로 보이는 싸이언 색상의 바다가 라니카이 비치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해변이었다.
입구의 오른쪽.
입구의 왼쪽.
완만한 기울기는 친절한 바다 씨의 성격 같다.
고운 모래와 깨끗한 물.
터프한 방문자.
한 아이가 증언한, 인간에 내재된 건설(문명) 욕구의 자연스러운 발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바다였다.
라니카이 비치는 말 그대로 환상적인 바다였다.
빛이 맑으니까 노란색도 환상적이다.
일본인 부부였던 걸로 기억난다.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인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우리나라 사람보다는 일본인을 더 자주 봤던 것 같다.
사진 왼쪽 구석에 찍힌 여자도 일본인이었다.
떼거지로 해변을 가로지르며 시끄럽게 노는 아시아인 남자들도 일본인이었다.
중국인만 시끄러운 게 아니라, 일본의 젊은 남자들도 꽤 시끄러운 편이다.
포인트를 바꿔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놀다 나올 때 보니 예닐곱 명쯤 되는 놈들이 한 여자한테 부탁해 단체 점프샷을 찍었다.
멀리서 그걸 보던 다른 한 일본인 남자가 절대 놓칠 수 없는 '대단한 재밋거리'라도 발견한 양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그 무리에 합류했다.
단체 관광객은 그들이 유일해 보였다.
니콘 D5500 바디에 35mm f/1.8G 단렌즈를 끼운 탓에 형편없는 사진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밝은 단렌즈 특유의 화질로 싸이언 색상의 물과 미숫가루처럼 고운 모래가 표현된 건 다행이었다.
번들 줌렌즈였다면 넓은 화각으로 시원한 풍경을 담았겠지만 화질의 섬세함은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모래가 미숫가루처럼 고왔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고 싶을 정도로 고운 빛깔이었다.
1등 포즈는 아들의 차지.
둥이맘의 부탁으로 낙서를 하고 인증샷을 찍긴 했는데 이렇게 찍고 나니 제주도 바다라고 해도 믿을 사진이 되고 말았다.
칼라풀한 흑형.
배 나온 백인 남자.
활짝 웃는 아들.
우리는 라니카이에서 제대로 힐링했다.
아이러니한 건 이날이 하와이 일정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것.
그 절실함 때문에 더 잘 위로받은 건 지도 모르겠다.
카일루아 비치 파크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산등성이에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차 안에서 바지를 갈아입었다.
운전대 때문에 생각보다 쉬운 동작은 아니었다.
윗도리는 갈아입지 않고 그냥 벗었다.
어깨를 가로지른 띠는 안전벨트.
이렇게 운전하고 다녀도 여기서는 뭐라고 할 것 같지 않았다.
경찰은 나를 발견하면 세워서 내리게 한 뒤, 그렇게 다니면 탄다면서 선크림을 발라줄 것 같았다.
차를 타고 몇 분 달리자 바다가 나왔다.
알로하, 카일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