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치 아이러니 쿼츠 무브먼트와 시스템51 오토매틱을 전격 비교해봤다.
어느 날
잡지에 게재된 광고 사진 하나가 심장을 때렸다.
스와치 아이러니 시리즈.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들른 면세점에서 지름신과 접신, 바로 질렀다.
다이얼과 인덱스 디자인이 딱 내 스타일이었는데 진짜 마음에 들었던 건 스트랩.
중세 기사들의 갑옷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듯한 은빛 그물 스트랩이라니.
동그라미 안에 세 개의 원이 있고(자동차 계기반처럼)
버튼(용두)은 두 개 이상 달려있어야 하며
흔들면 짤락거리는 소리가 나야한다는 게 내가 시계를 고르는 엄격한 기준이었다.
그 꿈을 이루고 나니, 그 꿈을 이루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흠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와치 쿼츠 무브먼트의 가장 치명적 문제는 초바늘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12시 방향을 찌른 채 꿈쩍도 않는다.
초바늘이 아니라는 뜻이다.
스와치 아이러니 시리즈의 모든 초바늘은 6시 방향의 작은 원 안에 들어있는 빨간 바늘이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계가 고장 난 줄 안다.
초바늘처럼 보이는 게 안 움직이니까.
그럼 저건 언제 움직이느냐.
베젤 오른쪽에 튀어나온 용두 중 무언가를 누르면 돌아가기 시작한다.
타이머를 재는 초바늘이었던 것.
또 하나의 단점은 날짜 창.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맞춰줘야 한다.
단점이라기보다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요소.
날짜 창의 숫자가 31까지 있는데 매번 끝까지 돌아간다.
4월이 30일까지만 있다고 해서 알아서 30까지 간 뒤 1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속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 베젤을 화려하게 수놓은 인덱스들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숫자가 새겨진 베젤 테두리가 돌아갈 것처럼 생겼지만 돌아가지 않으니까.
툭 튀어나온 세 개의 용두를 다루기도 쉽지 않고.
설명서 보고 따라한 뒤 돌아서면 잊어버려!
그래서 용두는 손등을 찌르는 용두인 채로 남게 됐다.
가끔 만지는 거라곤 가운데 용두를 한 칸 뽑아(두 칸 뽑으면 시간을 맞춘다) 날짜를 맞추는 정도.
무조건 31까지 가기 때문에 4월 1일에 시계를 보면 31로 되어있다.
용두를 한 칸 뽑아 돌리면 '1'로 맞출 수 있다.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날짜가 반대 방향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31에서 30으로 가지 않아 무조건 '1'로 맞춰야 한다.
스마트폰이 지갑처럼 보급된 시대에, 손목시계는 사치 그 이상의 물건이 아닐 수 있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거의 그렇게 됐기 때문에 패션적인 요소가 부각되는 것이고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가면 부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샤넬백이 여자들의 콧대를 높여주는 종노릇을 하는 것처럼.
시계도 어느 남자들에겐 지폐 다발을 보여줄 수 없으니 차고 다니는 물건인 것.
하지만 내가 진짜로 실망한 요소는 내구성이다.
베젤 껍데기가 벗겨지고 사진엔 표현이 안 됐지만 글라스에도 스크래치가 났으며 위에 있는 작은 원 안의 바늘은 정확히 정렬되지 않는다.
언제 저렇게 됐냐면 작년에 스와치 매장에 가서 배터리를 교체한 뒤부터 그랬다.
배터리를 무상으로 교체해주는 서비스는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이었지만 쿼츠 무브먼트의 한계인지, 보급형 시계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바늘이 숫자를 정확히 찌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는 사전 경고가 시연된 순간 나는 꼼짝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들해진 것이다.
햇수로 4년은 차고 다녔던 것 같다.
백화점에 갈 때마다 국민 남성 시계라는 티쏘 매장을 어슬렁거리다 돌아오기만 십수 차례.
하와이 여행은 좋은 기회였다.
이렇게 (기분) 좋을 때 지르면 가족도 딱히 뭐라 하지 않겠지.
아들 물건도 많이 사고, 아내 물건도 많이 사는 날이니까, 거기에 슬그머니 묻어가면...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스와치 매장을 발견했다.
스와치 디자이너들이 손목 위에 올라타는 작은 원 안에 이토록 다양한 디자인을 뽑아내는 걸 보면 정말 무릎 꿇고 빌게 된다.
당신들이 진정한 창조 경제의 왕이십니다.
기기적 특성이 반영되는 무브먼트는 별 차이 없다.
더 정밀한 시간 계측은 GPS가 탑재된 핸드폰을 따라갈 수 없으니 갈수록 더 화려해지는 디자인은 당연한 이치.
나는 쿼츠 무브먼트를 경험한 터라 더는 화려한 디자인에 끌리지 않았다.
다이얼하고 인덱스, 스트랩만 바뀌는 꼴이니까.
그런데 매장 한 곳에 오토매틱 라인이 전시돼 있었다.
오옹.
내가 구매할 당시 아이러니 시리즈가 20만 원 초반대였으니 오토매틱은 30만 원가량 하겠군.
얼마예요?
20만 원 초반이에요.
오잉?
뭐가 이렇게 싸?
'Sistem51 Irony'의 이름에서 '51'은 51개의 부품으로 오토매틱 엔진을 만들었다는 의미라고 한다.
나랑 아무 상관없어!
52개로 만들든 63개로 만들든 그건 니들 자유야!
'51'개라는 자랑은 최적화, 효율성을 극대화했다는 자화자찬 같지만 나 같이 민감한 소비자 입장에선 원가절감의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시계에 가해진 원가절감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당신이 오늘도 타고 다녔을 자동차에 원가절감 신공이 펼쳐졌다고 생각해보라.
철판은 더 얇아질 것이고 1000개의 나사가 들어가야 할 공정이 800개 정도로 줄어든다.
그렇게 처음엔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요소들을 '빼도 된다'고 해서 없애버리는 게 원가절감의 주요한 공정.
실제로 자동차 회사들은 부품들을 바짝 조이는 나사 대신 접착제를 늘려가는 추세다.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고장 난 차량의 접착 부위는 어떻게 뗄까? 부품을 어떻게 갈지?)
'안전'과 '원가절감'은 절충 가능한 목표일까?
자본가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부품 개수를 51개로 줄여 가격을 억제한 효과에 대해선 칭찬해줘야겠지.
찬찬히 훑어봤지만 안타깝게도 내 영혼을 움찔하게 만든 디자인은 없었다.
하와이 여행 2일 차에 방문한 알라 모아나 쇼핑센터.
그곳 방문이 목적이 아니라 월마트를 가려다 지나치게 된 상황인데 스와치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는 건 순리에 역행하는 일이다.
박근혜 정권도 그렇게 파탄 나지 않았던가
하와이에만 있는 특별한 모델이 있나 보러 갔더니 오토매틱 라인에, 인천공항 면세점에서는 보지 못한 물건이 진열돼 있었다.
덩치 큰 직원은 내가 찬 아이러니 블랙키 모델을 보더니 배터리를 프리로 갈아주겠다고 제안했다.
형광등 100개가 켜지는 순간.
마침 직원도 시스템 애로우 모델을 차고 있었는데, 나는 블랙키 모델과 같은 스트랩으로 교체가 가능한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젠장, 나는 그냥 가능한지 물어봤을 뿐인데.
덩치 큰 사내가 계산대 옆 책상에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우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교체 작업을 시작했다.
내 손목이 워낙 가느다란 탓인지 스트랩을 여러 번 조종했다.
나는 한국 시간으로 조종해달라고 한 뒤 박스에 담아 갔다.
(보증서에 이름과 이메일을 적었더니 스와치 소식을 보내와 스팸 등록)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봤다.
일단 뒷면.
아이러니 블랙키는 배터리를 교환하는 덮개가 있고, 시스템51은 오토매틱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유리창으로 마감돼 있다.
아이러니 블랙키는 갑옷이 금속 바보다 길지만, 시스템51은 금속 바가 훨씬 길다.
대충 이 정도의 차이.
나로서는 이 점이 좀 아쉬웠는데...
잠금장치가 다르다.
시스템51의 잠금장치엔 양쪽으로 튀어나온 단추가 있다.
처음엔 디자인 에러인 줄 알았다.
튀어나온 단추가 살집을 누르는 경향이 있어.
알고 봤더니 양쪽의 저걸 누르면 스트랩이 풀리는 구조.
요렇게.
수동에서 자동으로 발전한 모델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이러니 블랙키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스와치 아이러니 블랙키는 하와이 시간을 기억한 채 동면에 들어갔고
시스템51 애로우는 틈만 나면 죽었다.
한국에 도착해 짐에서 꺼냈을 때 죽어있었고 하루에 두 번 용두를 돌려도 다음 날 사망 상태로 발견됐다.
뭐지 이건?
하루에 세 번씩 밥을 줘도 한 번 거르면 죽어있기 일쑤였다.
녀석이 나한테 시간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내가 녀석한테 시간을 알려주는 기분.
이제는 틈날 때마다 용두를 돌린다.
매번 핸드폰 시간을 기준으로 정확히 맞춰놔도 볼 때마다 1분씩 늦다.
태엽이 풀리면 스프링 힘이 약해져 초침이 느리게 돌아가는 현상이라도 있는 건가.
전임자와 달리 초침이 도는데 1초에 한 칸씩 찰캉 찰캉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무소음 시계의 그것처럼 차차차차 흘러간다.
유리창으로 마감된 뒷면에 스프링과 그것이 풀리면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움직임이 관찰된다.
베젤은 무광이고 밥은 하늘색 화살표와 같이 반시계 방향으로 돌린다.
시계를 찬 상태에서는 내 쪽으로 용두를 돌린다.
용두는 2단계로 빠진다.
빠지는 폭은 크지 않아 툭, 툭 빠지는 격이다.
1단계로 빼면 날짜를 바꿀 수 있고 2단계로 빼면 시간을 바꿀 수 있다.
모던한 디자인이지만 인덱스 시인성은 의외로 떨어진다.
딱 보고 몇 시 몇 분이 바로 떠오르는 시계는 아니다.
(그렇기는 전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웹사이트의 상품 사진과 실물은 다르다.
느낌은 많이 다르다.
실제로 차보면 생각했던 것과 또 다르다.
시계를 살 때는 반드시 차 보고 구매를 결정하길 권한다.
오토매틱인 경우 부지런히 밥을 줘야 한다.
차고 다녀도 자동으로 밥을 주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을 들은 것 같긴 한데 그거 믿다간 큰 코 다친다.
특히 잠들기 전엔 용두를 왕창 감아두는 게 좋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시계에 발등 찍히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이런 짓을 반복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려고 오토매틱 시계를 샀나 하는 자괴감이
손목에 무생물 하나를 키우는 느낌.
스와치 아이러니 광고 사진을 찾으려고 웹 서치를 하다 발견한 황당한 가격.
31만 원?
그것도 33만 원에서 2만 원 깎아준 가격이라고?
수년 전 내가 제주도 면세점에서 샀을 당시 가격이 18만 원에서 19만 원이었다.
시중에서는 20만 원 초반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종된 모델인 걸로 아는데 시즌 오프 상품인 건 확실하니 가격이 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10만 원 이상 높게 부르고 있다.
귀해져서?
아마존 닷컴에선 정상적인 가격에 팔리고 있다.
내가 장만한 오토매틱도 19만 원대에 구입 가능하다.
헬조선에선 웹 서치 안 하면 '호구'라는 선에서 출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