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감
매일 아침이라고 시작했지만 사실 매일의 아침은 아닌 거 같다.
그럼에도 매일이라고 인식될만큼 나는 정서적으로 매일 아침 그것을 마주한다.
어느날은 아침에 눈을 떠서, 어느 날은 눈을 뜨고 물을 마시고 아침일기를 쓰고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리는 아침루틴 어디쯤에서 불현듯 그것과 마주한다.
대부분의 날들은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느끼고 흘려보내기 일쑤지만
어느 날은 내가 우울감을 인식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느끼지 못해서 우울감과 싸운다.
그런데 나는 실체가 있는 존재이지만 실체가 없는 우울감과 대체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애초에 싸움이 되는 싸움인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싸운다. 잘 싸우기 위해서 먼저 하는건 우울감의 모양을 가늠해 보는 거다.
얘는 어떻게 생겼나, 어디에서 왔나, 무엇으로 구성되었나?
그렇게 나는 실체는 없지만 실존하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아간다.
운이 좋은 날들은 우울감이 무엇 때문에 발생했고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있다.
알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알고 보면 별거 아닌 모양새에 허탈함을 느낄 때도 있다.
가령, 인스타그램을 통해 잘먹고 잘사는 듯한 누군가를 보았는데 내가 처한 현실은 허덕이고 있어서 질투의 모양을 하고 있거나
아침에 엄마가 운동을 간다고 사소한 거짓말을 했는데 그게 너무 거짓말 인 것을 내가 알게 되었지만 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어서 찝찝하다 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것들이 우울감이 되어 내게 왔다는 걸 알게된다.
‘이렇게 시덥잖은 것들에 집착하고 있었단말야?’ 나 자신에게 기가 막힐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내가 날 너무 크게 바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래. 난 유치하고 사소하며 평범하기 그지 없는 구석을 가지고 있다.’ 라고 받아들인다.
나란 사람이 담대하고 쿨하고 특별하길 바라지만 나를 나대로 보지 못하고 이상에 맞춘다는 것 자체가 날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건 존재 만으로는 특별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말이다.
그래서 난 그냥 최대한 할 수 있는한 있는 그대로 날 인정한다.
그럼 최소한 있는 그대로의 날 나라도 받아들여 줬으니 내가 날 존재만으로 얼마나 귀하고 특별히 여기는 거 같은 기분을 가질 수 있게 되는지 모른다.
이렇게 우울감은 나와 남 (그것이 알고있는 남이건 알지 못하는 남이건 간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거나
나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외에 속하는 우울감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모양새를 그려보아도 도무지 모르겠는 우울감
어디서 왔고 무엇 때문인지 전혀 모르겠는 우울감
그럴땐 정말 무기력함을 느낀다. 가끔은 화가 나기도 한다. ‘왜 이런 감정을 상황도 없이 나는 느낀단 말인가?’
그때가 정말 우울감과 내가 싸우는 시점이 된다.
‘너는 어디에서 왔고 왜 왔냐고. 나는 널 느끼고 싶지 않아.’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울감은 좀처럼 자리를 비켜주질 않는다.
너는 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있는다. 그리고 다음날도 찾아오고, 또 그 다음날도 찾아오거나 어느 순간인지 알 수 없는 날에 불쑥 찾아온다.
반갑지 않다.
마치 빨랫줄에 젖은 채로 널어진 빨래처럼 알 수 없는 우울감은 날 젖은 빨래처럼 만든다.
빨래집게에 집혀 무겁고 축축하게 축 늘어져 있다.
‘하. . 빨리 뽀송뽀송해 지고 싶다.’ 라고 생각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건 그날의 햇볕과 바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내가 작년부터 하기 시작한 일은 싸움을 해서 이길 수 없다면 그냥 동행하기로 했다는 거다.
‘그래. 나는 지금 우울감이 들어. 오늘은 그런 날이구나.’하고-
이십대를 돌이켜보면 우울감이 동행이 가능한 대상인가? 결코 아니었다.
결코 동행하고 싶지 않았지만 늘 나와 동행한 대상이었고, 결국 우울감은 날 집어 삼켜 바닥이 없는 늪으로 끝없이 추락시키는 거 같았다.
일상은 망가지고 무너졌고 관계 또한 엉망진창 이었다.
그때 내가 한 선택들은 나를 해치는 방법이었다.
나는 컨트럴타워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그건 엉망진창 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 마흔의 나는 그때와 다른거 같다.
우울이 동행이 가능한 대상이 되었고, 우울의 존재를 받아들여 주자 그것이 날 집어 삼키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난 우울과 동행한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쩜, 얘가 나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받아들여주지 않으니까 얘는 얘대로 서럽고 화가나서 더욱 크게 자기 목소리를 냈던거지.
“야! 김혜진. 나는 너한테 있으면 안돼? 나도 너의 일부라고. 날 알아줘!.”
그리고 나는 안다.
우울감은 우울감대로 인정하고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성실히 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걸
그것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현재까지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