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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Jan 09. 2024

무능한 척 하는 어리석은 유능

요한복음 2:13-25

20240105.금 / 요 2:13-25


> 요약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판매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장사하는 집을 말라고 하신다. 유대인들은 네 행동으로 우린 표적을 볼 수 없다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유대인이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일으키겠다 하신다.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표적을 행하셨고 많은 이들이 그를 믿었다. 


> 묵상

예수님은 성전에서 판매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내쫓고, 돈을 쏟고, 상을 엎는다. 

한마디로 상거래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데 깽판을 부리신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상거래는 분명 이전의 이들에게 어느샌가부터 익숙한 것이 되었으리라 

그들은 왜 성전에서 상거래가 익숙해 졌을까?

성전의 본질을 명확히 모르거나, 명확히 알고도 각자의 필요를 위해 묵인한 자들일거라 생각된다.

그렇게 성전의 본질을 흐리는 자들 가운데 성전의 본질을 명확히 아는 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깽판을 치는거다.


사건을 놓고 제자들과 유대인의 시선이 다르다.

제자들은 말씀을 기억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탓한다. 탓하는 내용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한다. 한마디로 

“야! 네가 이렇게 하는데 우리가 널 어떻게 믿냐. 너 이런 짓을 하고도 우리가 믿을 만한 뭔가를 해봐.”

하는거다. 애초에 별로 믿을 생각도 없으면서 간보는 척 하는게 웃기다. 


Q. 그런데 나도 이들처럼 본질을 흐리고 결국 내 생각대로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결국 나의 신앙은 자기중심성으로 흐려지고 나는 조건을 걸어 사랑과 믿음을 얘기한다. 


삶 안에서 나와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으면 전혀 안그래 보이지만 상황과 사람과 갈등이 일어날 때 결국 숨겨져 있던 자기중심성이나 조건은 수면위로 떠오르는 거 같다.


사촌언니 간경화에 반응하는 나만 봐도 그렇다. 나는 본질인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그저 ‘간경화’에 반응해 ‘안타까움’이 앞선다.

주일 설교처럼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왕하6:33)”하는 여호람이 나다.

그러니 이후의 나는 ‘이거 하나님한테 온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믿는 제가 지금 해야는거죠?’하게된다. 


그것을 드러낸게 이수를 통한 일들이었다. 

나는 정말 그때 하나님이 이해가 안되었다. 전남편 바람났던 것보다 더 이해 안되었다. 

’하나님 이럴거면 왜 묵상시킨 거예요? 하나님 그랬으면 저한테 감당할 힘을 주셔야죠! 하나님 제가 안될걸 알고도 저보고 관계를 맺으라 하신 이유가 뭐예요?’ 

신앙생활 하면서 그렇게 많이 하나님한테 따지고 물어본건 처음이였던 거 같다. 


내게는 타자로 인한 사건을 통해서는 무너지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했던거 같다.

그런데 이수를 통해서는 내가 안되어서 죽을거 같았다. 이수는 어차피 뭔가를 하고 안하고 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돌봄받아야 할 아이였을 뿐이니까, 그 상황에서 뭔가가 되고 안되고는 내 몫인건데 나는 정말 안됐다. 

안되는 날 견디지 못했다. 그러자 한번도 안해본 말들을 하나님한테 하게 되었다. 


“하나님, 이러려고 데려오라 한거라면 전 이제 선한일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일들은 무서워서 못하겠습니다.” 나이런 나의 고백이 본문의 유대인들과 다를게 없다고 본다. 

본질을 못봐서 헛소리 하면서 남탓하며 조건거는 유대인처럼 말이다.


나의 계획적인 노력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목장에 앉아있는 혜림이를 보면서,

나의 계획적인 노력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리스도인인 흰솔이 이모 어린이집에 들어간 이수 소식을 들으면서 느낀다.

나는 그저 흐르는 물위에 떠있는 꽃잎처럼 성령님의 흐름대로 살아가면 되는구나. 

나는 물을 흐르게 할수도 멈추게 할수도 없구나. 때론 의지를 계획하며 써야 할 때가 있겠지만 지금의 때에, 나에게 맞는건 아닌 거 같다. 난 뭘 그렇게 하려고 했다. 모르면 가만히 있는게 적용이라는 김양재 목사님 말이 생각난다.


그래서 나한테는 공동체가 필요한 거 같다. 

말씀이야 떨어져있었던 적이 없었으니 내가 말씀 안에서 하나님 뜻이라며 완전 헛다리 짚고 있는건 아닌지 분별하게 도와 줄 이들 말이다. 

그게 나도 살고 남도 살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 삶   

잠잠히 인내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였던 거 같다. 사건에 잠잠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목장에 잘 나누고 가는 거

예수님을 동일시하며 모든 것들을 따라 하려는게 나쁜건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왜 그런건지 근원 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 기도

하나님, 무능한 척 하지만 결국 나의 유능을 믿고 있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고 뭔가 싶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믿는 저를 믿고 있는 저를 믿는 위험함을 피하길 기도합니다. 본질을 못보는 흐린 눈을 가진 인간일 뿐인데 선명히 보고 있는 듯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주님, 깨끗하고 선명한 눈을 가진 하나님을 보길 기도합니다. 사건에 반응할 때 자기중심성으로 반응하지 않게 절 인도해 주세요. 또한 주님 앞에 조건을 붙이는 자가 되지 않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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