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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류 Oct 26. 2023

아기가 태어나다

취리히 트리엠리 여성병원에서...

2013.4.26 13:37


스위스 취리히 트리엠리(Triemli) 병원에서 우리 아기가 태어났다.


앞서서도 썼지만 보험 때문에 참으로 험난한 출생이었다.






예정일보다 한주 늦은 41주가 되고도 아기는 나올 생각도 안 하자 겁대가리를 상실했지.... 진통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26일 새벽 5시경

일생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아픔이 느껴지고 "이것이 진통이구나!"


사람들이 말하는 "딱 감이 와요.", "그냥 알게 돼요." 이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겠더라.


시간을 측정하니 13분... 6분.. 5분 간격.

그래 그래 바로 이거구나!



병원에 미리 전화해 놓고 남편은 시어머니를 깨우고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진통 오고도 샤워하고 가방도 챙기고 이것저것 한다던데 엄살왕인 나로서는 버틸래야 버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정말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태인데 그런 게 가능한가 싶었다.

택시 안에서 몇 번이고 온 진통으로 꽤액꽤액 소리소리 지르고, 기절하기 직전인 그 아픔은 차마 말로 표현을 못한다.


설사, 생리통, 복통 이런 아픔?

아니다 배가 아픈 게 아니다.


하반신이 빠져나가는 아픔이다.


등 밑 척추뼈와 골반 사이에 엄청나게 큰 무언가가 끼어있고, 그것을 빼내야 할 힘이 들어가지 않는 그런 아픔이다.


상상이 가는가!


하반복부부터 등 허리 골반 한마디로 뼈가 아픈거다. 뼈가!


그런 아픔이 오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무언가가 밑에서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양수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피였다.


새벽 6시 반 즈음, 택시는 병원에 도착하고 우리는 분만실로 직행했다.


진통이 빠른 간격으로 와서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고, 언제가 되어도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지옥의 시간이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번갈아가며 허리와 골반 마사지 해줬는데 내진해 보니 고작 1센티 열렸단다.

아니, 1센티에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단 말인가?

그렇지, 나는 엄살왕이니까.


의사,  조산부, 간호사 등 몇 명이 교대로 들락거리면서 뭔가 각자의 역할을 하고 나간다.

진통 오면 심호흡 크게 하라는데 진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니 심호흡을 어떻게 하는 건지도 생각이 안 난다.

아기한테 안 좋다고 계속 심호흡하라는데 아기는 커녕 내가 살고 봐야겠다.

꽤액 나 죽네. 소리 질러야 그나마 좀 살 거 같았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당신 친구분에게 "소류는 진통 때 너무 소리 지르더라."라고 말하니

그 친구분 왈 "일본인은 점잖고 교양이 있어서 소리 안 지른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는 대사다.


"그러는 당신은 제왕절개 했잖아요."라고 받아쳐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참아~~!"

라고 아주 이성적인 시어머니에게

"시끄러워요!! 내일 따윈 안 와요!!!"

라고 소리 지를 뻔 했다.


진통이 멈추면 또 미안하게시리 아무렇지도 않고, 진상 떤 거 때문에 고개를 못 들겠더라.ㅎㅎ


한 두어 시간 진통 겪다가 이대로 죽겠다 싶어 오페 오페!! 에서 무통 무통!!으로 바꿔 소리 질렀다.


나는 무통을 독일어를 모르고, 남편은 무통을 일본어를 모르니 그 와중에 폰 가져오라고 해서 번역기를 돌려가며 보여줬다.


무통주사를 맞기 전 여러 검사한 후에


신경이 나가도 된다.

어찌 돼도 된다.


등의 무통에 따른 악영향에 대한 날치기 사인을 하고 어서 맞기만을 기다렸다.

척추에 주사를 놓는데 아픈 것도 전혀 모르겠더라.


진통에 비하면 태동 설사 장염 위염 위경련 복부압박감 이런 건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다.


(지금 모유수유하면서 젖꼭지가 찢어져 피가 나고 있어도 진통이 무조건 갑이고, 피부 레이저시술할 때 마취 없이 진행해도 진통이 무조건 갑이다.)


진통은


진짜 땀 뻘뻘 나고,

세상을 포기하게 만들고,

고문, 생체실험, 학살 이런 고약한 단어들만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다가

무통 주사를 맞자마자 어머나 세상에, 천국이고, 해방이다.


진통 측정기 보면 진통 간격이 빠르고 격하게 오고 있지만 말 그대로 무감각.


다리는 마취로 인해 이미 감각이 없고, 소변기 꽂고 아래서 뭔가를 하지만 감각은 없다.

이미 하반신은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


편안하게 시어머니랑 잡담하고, 남편은 간호사가 가져온 식사를 먹더니 의자에 뻗어서 자기까지 한다.

옆방 다른 나라 여자는 몇 시간 동안 안쓰러울 정도로 소리 지르고 울고불고 난리 났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조산부가 들어와 내진하더니 8센티 열렸다고 한다.

빛의 속도로 열린다며 놀라더라.

그 후 2시간쯤 지나자 10센티 다 열렸다며, 본격적으로 낳을 태세를 갖춘다.


처음엔 내가 하도 엄살과 진상부려서 진행이 늦어질 거라는 생각에 촉진제와 통증완화제를 넣었는데 약투하 속도를 아주 느슨하게 조은다.


무통 약기운이 떨어져야 제대로 힘줄 수 있다며 조금 기다리다가 바로 힘주기 시작했다.

보통 첫 출산에는 힘주는 법을 몰라서 공부를 좀 해간단다.

실제로 우리 언니는 힘을 잘못 줘서 안구 쪽 실핏줄이 다 터졌었다.


근대 여기는 조산부가 크고 긴 타올로 내 몸을 등부터 감싸고 앞에서 양쪽으로 당기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지 말고 배나 아래쪽에 힘주라고 하며 몇 번 같이 연습을 했다.


그렇게 연습인 듯, 실전인 듯 어영부영하다가 약간이라도 진통이 오는 게 느껴지고, 한번 힘을 주자 남편이 머리 보인다!!!라고 한다.

감각이 없으니

"어디 보자. 나도 보여줘."라고 말할 기세였다.


그 후 서너 번 더 힘줬더니 쑤욱 뭔가 아주 부드러운 뱀꾸러미 같은 게 나오는 기분이 들더군.


그리고는 핏덩이를 내 가슴팍에 안겨준다.

피를 어찌나 쏟았는지 한기가 느껴졌다.

너무 춥다고 하니 양말을 신겨줬다.

피가 빠져나가면 추위를 느끼는 것이 꼭 전쟁영화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아기를 보니 웃음도 나오고 신기하기도 해서 이리저리 살펴보다 어디 기형적인 곳 없는지 찾기 시작하는 여유까지 부린다.


그리고 태반을 꺼냈다.


남편은 처음부터 줄곳 의사 선생님과 조산부 옆에 있으면서 생중계해주고 탯줄도 자르고 태반 보면서"이게 뭐지?" 라며 세 명이 의논까지 했다.


회음부 절개를 안 해서 그런지 약간 찢어졌다고 꿰맸는데 녹는 실이라 다시 내원 안 해도 된다고 한다.

꿰맬 때 아프면 말하라고 했지만 무감각 상태라 아기랑 사진 찍으면서 잡담하는 사이에 다 꿰매놨더라.


이것도 남편이 보려고 하자 의사 선생님이 이건 봐서 좋을 거 없다며 가서 놀라고 했다.

이런 상태로라면 10명도 낳겠네. 라며 낳고 난 자의 여유도 부리며 사진까지 찍는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피가 엄청나게 났고, 뱃살은 흐물흐물하고 임신 6개월 정도의 배크기가 되었다.

낳는다고 바로 쑤욱 들어가는 것도 아니구나.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다른 침대로 옮겨 타고 병실로 이동하면서 걸을 수 있으면 소변기 뽑겠다고 하는데, "내가 걸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트리엠리 병원은

여성병원인데 병원 같지 않았고,

의사의 위엄, 파란 마스크, 수술조명 아래

이런 드라마에서 보던 것이 전혀 없다.


그냥 집에서 아기 낳는 거 같이 편안하게 잡담하며 순산했다.


아기 몸무게는 2.960

키는 47

머리둘레 33


한국은 애 낳으면 아기에게 엄마이름을 써놓지만, 여기는 애 낳기 전에 미리 이름을 지어서 아기침대머리쪽에 아기이름을 적어둔다.


출산하러 갈 때 잘 때 입던 옷차림 그대로였고 아무런 짐도 챙기지 않았다.

병원에는 아기옷, 기저귀 등등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었고, 산모용 종이팬티 산모패드 이런 거도 다 있어서 몸만 가면 된다.


출산 당일에 젖물리고 다음날 서 있을 수 있게 되자 소변기 뽑고 샤워도 했다.

출산 다음날 샤워를 해?

한국이라면 말도 안 된다 하겠지만 사실 나는 아기를 낳은 후 좀 건강해졌다.

태반을 통해 안 좋은 것이 다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출산 이후로 잔병도 없어졌다.


금요일에 아기 낳고 월요일에 퇴원했는데 이것도 원래는 3일이면 퇴원이지만 일요일에 의사 선생님이 없어서 하루 더 연기한 거다.


물론 미역국은 없지만 병원밥이 정말 맛있었고, 안정감과 자연스러움 속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러고 5년 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만일 일본에서 임신을 한다면? 음...

혹시 둘째를 가져도 스위스에서 낳아야지라고 생각했다.


트리엠리 병원은 취리히에서 꽤 유명한 병원이고 영어도 가능하니 독일어를 몰라도 불편함은 없었다.


                                   <태어난 날의 우리 아이 : 검은 건 피가 낭자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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