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혁 초대전, 중첩된 단면들
1.
글자들이 깨알같이 적혀있다.
직사각 형태를 따라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육하원칙에 따라 논리적으로 연결된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간혹 온전한 단어들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철자가 빠졌거나 틀린 단어들이 지나치게 많고,
그나마도 되지 못한 의미 없는 철자들도 너무나 많다.
작품의 가장 가운데 부분이다.
이 현란한 나열의 시작 지점, 혹은 종착 지점이다.
비교적 진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TAKE iNtuinnerHUC...'
'Take intuition'은 '직관을 가져라'라는 뜻이고,
'Take intention'은 '목적을 가져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두 문장은 상반된 뜻을 가졌다.
물론 작품에는 이 두 가지 문장 모두 온전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다음에 연결되는 'inner'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작품은 단 한 줄의 온전한 의미도 용납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문자와 소문자도 질서 없이 섞여 있다.
영어와 한글도 마구 섞여 있다.
이 작품에서는 글자들이 지층처럼 쌓아 올려졌다.
다행히도 어느 한 줄에서 알고 있는 단어들이 많이 보인다.
'연계', '실사', '고지', '상주', '현대', '시도', '선사', '고지', '연계', '고지', '음식', '사회'...
하지만 띄어쓰기 없이 글자들이 쭉 나열되어 있기에,
정말로 글자들이 이 단어를 이루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그것들이 단어가 맞는다고 가정하더라도,
단어들은 조사와 접속사로 연결되지 못하고 단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2.
작품의 제목은
우리가 사전적으로 알고 있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이라는 뜻의 '상념'이 아니라,
'념상'이다.
두 개의 글자가 뒤집힌 걸까.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한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글자의 형태를 좌우로 뒤집어쓰거나, 글자의 순서를 뒤집어쓰는 장면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어른들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질서가
아직 이들에게는 낯선 연유이다.
작품은 난독증을 떠올리게도 한다.
우리는 작품 앞에서
마치 글자가 있으되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 난독증 환자가 된 기분이 든다.
3.
하지만 이것은 글이 아닌 그림이다.
글이 아닌 그림으로서 작품은 질서 정연하고 매우 치밀하다.
작품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작가가 꽤 오랫동안 한 호흡을 유지하며 꽤 많은 글자를 한 번에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글자들은 커다란 밑그림 안에서 치밀한 계획 하에 채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에서 무엇을 '선'이라고 봐야 할까.
글자를 이루고 있는 작은 획들이 선일까,
아니면 좀 더 큰 시선에서 글자들의 나열을 하나의 선으로 봐야 할까.
다분히 선은 흐릿하고, 색채는 다채롭다.
첫 번째 초록의 작품에서는 화면의 중앙으로 갈수록 깊이감이 느껴지고,
두 번째 푸른 작품에서는 전반적으로 운동감이 느껴진다.
작품을 바라보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직관'도 '목적'도 아닌 감수성이다.
4.
'념상' 연작은 장지 위에 색먹과 금분, 옥분 석채를 썼다.
모두 동양화의 재료들이다.
비움이 아닌 채움을 선택했고,
채움을 통해 비움을 실천했다.
5.
이 작품에서는 아예 자음과 모음의 결합이 보이지 않는다.
운 좋게 '선', '실', '촉' 같은 글자들이 눈에 띄긴 하는데,
사실 그것들은 글자가 아니고
말 그대로 운 좋게 그렇게 보일 뿐이다.
하지만 터치들이 무질서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가령 흰색의 터치들은 제법 화면에서 균등하게 퍼져 있고
초록의 터치들도, 검정의 터치들도 마찬가지이다.
색들은 순서대로 쓰였다.
가장 먼저 푸른색이 칠해졌고, 그다음 초록이 칠해졌으며,
그다음에는 검정이, 마지막에는 흰색이 칠해졌다.
색의 대비는 음영을 연출한다.
그리하여 화면에는 넓고도 얕으며 균일한 깊이감이 완성되었다.
6.
이 작품의 제목은 '딴생각'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 옆으로 새는,
짧고 꼬부라진 우리의 의식의 흐름이 무한으로 펼쳐져 있는 듯하다.
마구잡이로 휘어지는 짧고 굵은 터치에서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향해 분노의 감정이 비집고 나오는 듯하다.
안간힘을 다해 의미를 짜내려는 의지도 엿보인다.
하지만 결국 작품은 이야기한다.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낙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시 정보>
중첩 된 단면들 Layered Facets _ 2025.5.28-6.14
SPACE UM _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309길 62
<작가 소개>
지아혁 _ 저는 자동화 기법을 활용해 흘러간 기억의 파편들; 비의도적인 흔적들을 끄집어내어 작품 위에 직접 써 내려갑니다. 이 파편들은 자각되지 못했던 감정과 기억의 단편들을 담고 있으며, 그 다양성은 서로 얽히고 섞여 하나의 페르소나로 시각화됩니다. 이를 통해 일련의 우연성에 의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사회와 정체성의 새로운 본질, 그 치열함 속의 긴장감을 드러냅니다.
(작가 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