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이를 데리고 안전하고 조용하게 머물고 싶어서 16구에 숙소를 잡았다. 지도로 살펴보니 근처에 편의시설과 마트, 식당도 많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부촌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프랑스의 한 부르주아 할아버지 댁에 머물게 되었다. 전직 외교관이자 교수였던 할아버지는 현재 84세이시고, 방문객으로서는 방이 몇 개인지 언뜻 헤아릴 수 없는 큰 아파트에서 혼자 사신다. 자녀들은 출가해 미국과 멕시코에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방은 한때 할아버지의 자녀가 쓰던 방이다.
방 안에는 한때 그들이 쓰던 물건과 인형 책들이 놓여있다. 뿐만 아니라 공용 공간에는 온갖 나라에서 물 건너온 조각과 장식, 그림 등이 걸려 있다. 할아버지 혼자 이 큰 살림을 어쩜 이렇게 반질반질하게 관리하실까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청소하러 사람들이 온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집의 주방이 마음에 들었다. 이미 외국 레스토랑 음식에 물려버린 우리는 매일 라면을 끓여 먹을 기세였다. 지난 여정의 암스테르담, 퀘벡에서 주방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 늘 외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예약창에서 봤던 주방이 너무나 깨끗해서 사용하기 좀 조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안 그래도 주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 리처드 할아버지가 걱정하는 기색을 비추셨다. 하지만 나 역시 뒷정리라면 뒤지지 않는다. 이제는 마음을 놓으신다.
리처드 할아버지는 우리의 편의를 이해 많은 애를 써주고 계신다. 세탁기도 내어 주시고 주변 식당 안내도 친절히 해주셨고 주요 관광지로 가는 길도 손수 알려주셨다. 냉장고 안의 공간과 주방 도구도 일일이 설명해 주신다.
"내 집 주방이 마음에 드시나요?"
"네. 제가 가진 주방보다 두 배 넓고 깨끗해요. 저도 늘 주방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편이에요."
"이 도구 뭔지 아세요?"
"아니요."
"야채를 채 썰 때 쓰는 도구예요. 요리를 잘하지 못하지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죠."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아주 오래되진 않은 모양이다. 아직 그 질문은 드리지 못했다. 처음 재인이를 만났을 때 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흔들리던 눈동자에서 왜 혼자서 이 집의 물건을 관리하며 살고 계신지, 또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여행자를 들이시는지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나는 한국에 두고 온 우리 집 사진도 보여드린다. 꼭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나도 나름 깔끔하게 해 놓고 사는 사람이라는 걸 그냥 알려주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집이 모던하고 아름답다며 깜짝 놀란다. 그제야 남편에 대한 질문도 조심스레 하신다. 우리에 관한 많은 것들이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2025.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