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할아버지 댁에 나오면서 이번 주에는 조언해 주신 대로 시장에 가볼까 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일요일 오전 몸은 무거웠고 도저히 밖에 일찍 나가고 싶지 않았다. 파리에 도착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외출을 했으니 그럴만했다. 그래서 정오가 지나서야 집을 나섰다.
원래는 로뎅 미술관을 향해 집을 나섰는데, 동네 장이 그때까지 파하지 않고 서 있었던 거다. 로뎅 미술관은 딱히 예약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장을 좀 둘러보기로 한다. 그런데 시장에 들어선 지 3분도 되지 않아 그곳에서 파는 온갖 싱싱한 식자재를 보고 흥분하고 말았다. 맛조개 한 묶음이 15유로였고, 큼직한 구이용 소고기가 6유로였으며, 두 번 정도 해 먹을 수 있는 양의 큼직한 스테이크용 연어도 15유로였다. 모두 사가지고 집에다 두고 왔다. 이 정도면 매일 마트에 들르지 않아도 며칠은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비싸서 몇 년째 맛보지 못했던 맛조개를 이렇게 실컷 먹어보다니!
싱싱한 식자재가 허전했던 마음을 채워주었다. 그날 시누이가 2년 전 수술받았던 뇌수막종이 다시 2센티 자랐다는 소식을 들었고, 재수술을 받게 되면 시력이 몹시 손상될 거란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이틀 전 안부전화를 드렸을 때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힘없이 처졌었는지, 남편은 또 갑자기 시댁에 가서 밥을 먹고 왔는지 정황이 이해가 됐다. 시누이의 증상은 오늘 산 식재료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건강한 제철 음식을 잔뜩 먹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보다 버스가 매우 늦게 왔다.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타게 된 한 동네 할아버지는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내게 보이신다. 기다리는 동안은 재인이와 노닥거리며 보냈는데, 버스에 타고나서는 재인이가 고모가 불쌍하다며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여정을 거쳐 무사히 미술관에 도착한 우리는 조각 작품을 즐겼다. 다행히 재인이는 회화 작품보다는 조각 작품이 볼 만하다고 한다. 오늘은 마음에 드는 조각을 따라 그릴 거라며 야무지게 노트와 샤프를 챙겨 왔다. 그런데 뭔가 심오한 로뎅의 작품에 공감하기 어려웠는지, 고르다 고르다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을 하나 골라 그리기 시작한다. 까미유 끌로델은 로뎅의 조수이자 제자, 그리고 그의 연인이었다.
20년 만에 찾아온 로뎅 미술관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11월에도 꽃이 만발했다. 그리고 토끼가 몇 마리 다녔다. 여기서 키우는 토끼인가. 재인이는 카페에 자리 잡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마음에 안 든다며 조금 속상해했다. 그렇게 안 좋은 소식을 듣고도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오후를 보냈다.
저녁에는 시장에서 사 온 연어와 냉장고에 있던 감자, 당근을 함께 굽고 맛조개를 끓였다. 재인이가 잘 먹는다.
"고모도 이거 먹으면 좋을 텐데..."
2025.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