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도서관을 전전하며 도판으로 접했던 명화들이 이곳에서는 흔하다. 한국에서는 미술 서적이 절판되는 경우가 많아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도서관을 갔어야 할 때가 많았다. 이번 여행에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다섯 번쯤 봤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도 그런 것 같다. 작가가 같은 주제로 여러 점 제작한 것이 다수의 미술관에 골고루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로뎅 미술관에 갔다가 반 고흐의 탕기 아저씨 그림을 우연찮게 봤고,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러 오랑주리 미술관에 갔다가 피카소의 작품을 여러 점 봤다. 또 피카소 미술관에서는 마티스의 그림을 여러 점 봤다. 모네의 그림은 거짓말 안 보태고 100점쯤 본 것 같다.
오르세 미술관에 갔을 때, 관람을 지겨워하는 아이가 한쪽 팔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관람인지 산책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나 명화가 걸려 있는 파리에서 그냥 그렇게 지나쳐도 아쉬울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오르세 미술관은 내게 좀 특별한 곳이기에, 이곳에 다녀와서는 아이에게 한 마디하고 말았다. 엄마는 너와 미술관을 다니는 게 조금 힘들다고. 정해진 일정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노트를 챙겨 그림을 그리든, 틈틈이 혼자 의자를 찾아다니며 앉든 네가 스스로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으라고.
다음날 루브르에 갔을 때에도 아이는 미술관을 제대로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듯했다. 귀찮다고 드림렌즈를 끼지 않아 시력은 떨어져 있었고, 노트 챙기는 것도 잊어버렸다. 마침 비가 내려 우산과 우산을 가방에 담을 때 넣을 비닐봉지를 새롭게 챙기는 것만도 내겐 버거웠기에, 나도 잊고 말았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고 며칠 간만 1일 1 미술관을 천천히 도는 일정도 우리는 겨우 소화하고 있다.
사실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은 커도 너무 크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루브르 미술관에는 여러 <사르다나팔의 죽음> 중 가장 훌륭한 버전이 걸려있었지만, 왠지 들라크루아 기념관에서 봤던 좀 더 사이즈가 작고, 붓칠이 성거웠던 버전보다 감흥이 적었다. 너무 많은 작품이 걸려 있는 큰 장소에서는 작품의 감흥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도 <모나리자> 만큼은 제대로 즐겼다. 20년 전 너무 많은 인파를 뚫고 그림 앞에 가기가 두려워 포기했었던 작품인데 이제는 인파가 통제가 되고 있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앞쪽 틈이 생길 때마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웬일로 이번 일에는 재인이도 적극적이었다.
모나리자는 예뻤다. 왜 그런 명성을 얻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될 만큼. 도판으로 너무나도 많이 봐왔던 작품이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명성을 얻고 있는지 이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도판에서는 모나리자가 나이도 좀 들어 보이고 뚱뚱해 보이기도 했는데, 액자 안에서만큼은 정말 예뻤다. 그래서 한동안 홀린 듯 작품을 바라봤다. 작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마치고 빠져나가곤 했지만 우린 정말 충분히 작품을 지켰다. 20년 전에도 용기를 내 작품을 볼 걸 그랬다.
2025.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