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할아버지는 우리가 나갈 때가 되자 조금 우울해 보이셨다. 사람이 곁을 떠날 때가 되면 여느 어르신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끼리만 지내는 새로운 숙소에서 누군가의 간섭 없이 마음껏 사 먹으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새 숙소의 주인장은 체크인 때 키를 받으려고 잠깐 만났을 뿐이었다. 왕년에 승마 선수였고 88 서울올림픽 때 출전했었다고 한다. 친절하고 호탕한 아저씨는 집안에 있는 모든 기자재를 다루는 법을 설명해 주셨고 냉장고와 찬장에 있는 식자재, 커피 캡슐까지 제공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식자재는 대부분 날짜가 지난 것들이었지만, 커피 캡슐은 아침마다 잘 이용하고 있다.
집안의 구조는 조금 특이하다. 아파트의 계단 아래 통로를 통과하면 나오는 작은 마당을 낀 1층 집이다. 일단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1층에는 주방과 거실이 있고 지하에는 침실이 있는데, 1층 바닥에 직접 개폐가 가능한 창문이 달려 있어 지하 침실과 거실이 창문을 통해 개방되었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유리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래가 훤히 들여다 보애는 유리 바닥재를 밟고 다니는 것이 아찔했다.
침실은 그전 숙소보다 조금 더 따뜻하다. 하지만 새로운 숙소에서의 첫날은 역시 낯설다. 리차드 할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저녁을 해 먹으며 즐거워했던 것도 잠시, 자려고 누우니 낯선 공기가 나의 심장을 죄어 왔다. 여정의 중턱을 겨우 넘었고 앞으로 2주가량 더 떠돌며 살아야 한다. 서울의 우리 집이 그리웠다.
202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