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느리다는 건 다 옛말

by 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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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이며 지하철이며, 박물관 입장까지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버린 유럽. 그 촘촘한 자동화 시스템 앞에서 나는 늘 종종거린다. 매일 아침 기상 후 그날 방문할 박물관을 찾고 예약하는데 늘 한 시간을 소요한다. 이미 벌써 어떤 곳은 마감되어 있다. 이러다 루브르, 오르세 마저 놓치고 말겠다 싶어 오늘은 며칠치 코스를 미리 짜서 예약을 해두었다.


베르사유 박물관 정원의 입장은 12시에 시작하고, 궁전은 3:30부터 입장할 수 있다. 기차역에서 내린 인파가 우르르 몰려가는 곳만 쫓아가면 된다 싶었는데, 구글 지도를 잠깐 보는 사이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흩어졌고, 나는 또다시 버벅거리는 구글맵에 의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외진 루트를 통해 베르사유 정원으로 들어갔다. 우린 전생에 왕족이나 귀족은 아니었나 보다 했다. 궁전은 당초 보이지가 않고 한동안 너른 벌판에 풀 뜯는 말 몇 마리 만을 보았을 뿐이다.


드디어 자전거 대여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이는 버키카를 몹시 타고 싶어 했다. 가격표를 보고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역시 애들은 뭔가를 타야 재미를 느끼는가 보다. 한 시간이면 코스를 다 돌겠다 싶었는데, 미리 사두었어야 하는 티켓을 사놓지 않아 정원 입구에서 한 번은 되돌아왔어야 했고, 지도를 잘못 봐서 다른 길로 들어섰다가 차를 되돌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었다. 말도 안 되게 비싼 요금에 한 시간이 지나면 추가되는 요금이 또 붙은 셈이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낯선 곳에서 지도를 보며 버키카를 운전하는 게 긴장돼서 그러는 건지 헷갈렸다.


궁전 입구에서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PDF 파일로 전송해 놓은 티켓이 핸드폰에서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직원은 뮤지엄 패스를 보여줬는데도, 베르사유 입장 티켓이 꼭 있어야 한다며 우리를 돌려보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의 스마트폰은 이메일과 연동되어 있지 않는 상태라, 하는 수 없이 한국의 잠든 남편에게 전화했다.


"여보, 미안한데 내 메일에 접속해서 티켓 다운로드하고 전송 좀 해줘."


그렇게 겨우 티켓을 받아 입장했을 때에는, 예약된 시간보다 한 시간 뒤였다. 다행히 직원은 시간까지 문제 삼지는 않았다.


버키카를 먼저 태워준 덕분인지, 입구 앞에서 한참 서 있는 동안 재인이는 스스로 짜증을 잘 삭였다. 그리고 입장해서는 재밌게 내부를 관람했다. 곳곳에 걸려있는 루이 13세와 14세, 15세의 이야기를 재밌게 잘 들었고, 그들의 침실과 연회장도 재밌게 봤다.


이곳에서는 텀블러를 사기로 했다. 네덜란드에서부터 느낀 건데 가족 선물로 텀블러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모두 똑같은 실루엣, 똑같은 품질이었는데 장소에 따라 표면에 입혀진 것만 달랐던 것이다. 얼마 전 남편은 아끼는 텀블러를 잃어버렸다며 속상해했다. 시어머니도 텀블러라면 만족해하실 것이다. 늘 텀블러만큼은 다다익선이라고 말씀해 오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딜 가든 텀블러의 가격은 모두 합리적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베르사유 텀블러는 디자인이 근사하다.


아트샵에서의 선물 구매를 마치고 나오는 길 하늘은 어둑해졌고 궁전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오래간만에 재밌는 시간을 보낸 재인이는 흥이 나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역까지 산책을 즐기고 있었는데 역 바로 옆에 있는 KFC를 발견했다. 리차드 할아버지가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고 하면 또 혀를 차시겠지만 '오늘은 치킨!'이라는 강력한 끌림에 우리는 홀린 듯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오래간만에 재인이가 한가득 입에 물고 뭔가를 먹는 모습을 봤다.


"엄마, 나는 매일 배 터지게 뭔가를 먹었어."


오랜만에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좋다는 말에 재인이가 대답해 준다. 정말 그랬던가. 난 왠지 아이의 끼니를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엄마인 것 같다. 편식이 있는 아이에게 골고루 영양섭취를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여행오기 전부터 안고 있었다. 나름 매일 장을 봐서 뭔가를 해주었지만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만들다 보니 메뉴는 한정되어 있었고, 어떻게든 먹이고 싶은 건강식품은 아주 조금 얹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접시 위에 완성물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것들 뿐이다. 하지만 오늘 저녁 뭐가 됐든 이렇게 맛있게 먹는 아이의 모습을 오랜만에 봤다. 그리고 안도했다.


202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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