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기록

by 정윤희

여행을 시작하면서 낯선 외국인과 일말의 소통과 온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던 나의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리차드 할아버지와도 대화가 진전될수록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식당에서나, 택시에서나 나에게 호의를 보이며 서비스를 제공하던 그 누구와도 제대로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물론 손님과 직원 사이에서는 정해진 말만 서로 주고받으면 그만이지만, 게 중에는 내게 진정한 호의를 보인 이들이 있었기에 나도 그만큼의 성의표시를 할 수 있었던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라는 정보를 말하지 않아도 전할 수 있었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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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이에게는 주어진 몫의 세상의 배려가 있다. 재인이를 키우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퀘벡의 식당에서도 예약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하고 있을 때 직원은 바테이블의 두 자리를 만들어 내주었다. 택시를 탈 때 그 어느 기사도 무거운 캐리어를 혼자 들어 올리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유료 화장실에서는 1유로와 2유로짜리 동전만 받고 있었는데, 직원이 아이가 동동거리는 걸 보고 작은 단위의 동전을 자신이 것과 바꾸어 우리를 들여보내주었다. 캐나다에서는 어린아이의 교통비가 무료였고, 파리에서는 어린아이의 미술관, 박물관 입장료가 무료였다. 세상이 어린 존재에게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배려를 내가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재인이는 처음부터 자신의 몫을 가지고 태어난 거다. 내 것을 빼앗은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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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공항에서 밴쿠버행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줄을 서고 있을 때 재잘대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한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분이신가 봐요?"

"네. 안녕하세요."


그러고 말 대화일 수도 있었는데, 마침내 가방 안에는 비행기 안에서 다 읽은 소설책이 한 권 있었다. 기회 돼서 한국 분을 만나면 주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밴쿠버 까지는 5시간 반이나 걸리니까.


"저... 혹시 필요하시면 소설책 한 권 드릴까요? 막 다 읽었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원래 책을 좋아하는데 사는 게 바빠 요새는 통 못 읽었거든요."


감사히 받아 든 아저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미국으로 이민 온건 83년도였고, 한국에는 88 서울 올림픽 때 방문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한국과 미국 모두 고향 같다고 하신다. 여행은 잘 안 다니다가 최근에 로마를 다녀왔고, 지금은 캐나다를 여행 중이시다. 아들이 동행하고 있었지만 제쳐두고 우리와만 대화를 하신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눈치이다.


"가방 좀 들어드릴까요?"


체크인하고 나면 보스턴백을 각자 하나씩 책임져야 한다는 약속은, 처음부터 재인이에게 무리였다. 공항에서 늘 나는 보스턴백을 양팔에 하나씩 들고 낑낑대며 다니고 있었던 거다.


"아, 감사합니다."


아저씨는 공항에 내려서도 우릴 찾아와서 가방을 들어주셨다.


"소설이 재밌네요, 한 챕터 만을 남겨두고 있어요."


그렇게 빨리 읽어버리셨다는 이야기에 나는 좀 놀랐다. 그러고는 아저씨는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불러주셨고 나는 핸드폰에 받아 적었다. 제대로 받아 적은 게 맞나 싶어 한 번 불러보라고도 한다. 나도 이름을 알려드렸다.


"저는 정윤희라고 해요. 영화배우랑 이름이 같죠?"

"아, 그러네요. 하하."


이 나이 때 어르신들에게 내 이름을 각인시키는 방법은 이게 최고다. 하지만 내 쪽에서는 차마 연락처까지 드리지는 못했다.


"나중에 미국에 방문할 일이 있거나, 아이 공부시키실 일 있으면 전화 주세요. 아는 건 많지 않지만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알려드릴게요. 그때 꼭 책값 드리겠습니다."


202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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