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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Apr 14. 2023

피자 안 먹는 시어머니

리처드 기어 닮은 모쏠 아들

나의 큰애는  남궁원 배우의 아들 홍정욱 씨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곤했다.

그러나 어릴 때 너무 윤곽이 뚜렷해서 노숙해 보였는데  그것이 문제가 될 줄이야. 

미국에서 1년 동안 ESL을 마치고 이민을 가기 위한 인터뷰를 하러 왔을 때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중 2를 마치고 와서 막간을 이용해서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말은 그런대로 하는데 문법을 잘 몰라서.

하루는 전화가 왔는데 같은 학원 학생이라며 여학생이 우리 아이를 바꿔 달라고 했다. 궁금해서 나중에 알아보니 대학생 누나가 우리 아이랑 사귀려고 전화했었다나.

 얼마나 겉늙어 보였으면.

홍정욱 씨는  자기 나이에 맞게  잘 생겼지만

대학생 누나가 중 2를 그렇게  봤다면  우리 아이는 뭐지?


그러므로  나의 아들 이야기는 아니다.

리처드 기어 닮은 지인의 아들은 매너 좋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얼마나 멋있게 생겼는지 모른다. 목소리도 엄청 스위트하고.

나이 30세가 되도록 연애 한번 안 한 모쏠이 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옆에서 설령 말린다 해도 그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며 바로 청개구리 탄생이 된다.


엄마는 철석같이 한국 아가씨와 결혼하리라는 미신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필리핀 아가씨를 만나고 있다는 아들 말에 설마 결혼까지?

나의 며느리는 서양 며느리라서 필리핀은 좀 동양적 아니겠나라며 긍정 신호를 보냈는데.

첫눈에 반했다니 할 말을 잊은, 아니 요즘에 어째 그런 일이 일어났나며 의아해했다.

첫눈에 반할 상대가 없어서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결혼이 늦어지는데 잘 된 거다라고 얘기해 보지만 한국 며느리가 아니라서 무조건 싫다는 거였다. 

결혼을 안 한 연년생 형은 엄마한테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뭐라 하고.


시어머니의 말도 안 되는 로망은 한국 며느리와 손잡고 쇼핑하고 맛집 가는 거라는데, 그것도 오손도손하게.

그 꿈이 무너지고 영어도 잘 못해서 말도 안 통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하소연을 했다.

그 아들은 집안의 온갖 풍파를 뚫고 결혼식도 안 올리고 동거하며 아기를 낳았다.

워낙 인정 많고 사랑이 넘치는 지인은 아기를 보면서 마음이 슬슬 녹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죄인도 아닌데 시어머니 자리가 자기를 싫어하는 눈치니까 남편과 아기만 보내질 않나.  아기 기저귀며 우유며 옷이며 바리바리 나르면서도 맘이 썩 풀리진 않는는데 아들은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니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시어머니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물론 아들이 제일 잘나고 너무 귀해서 아무(?)에게나 내어 줄 순 없다고 해도 이미 성인이 된  그 아들이 행복하다는데 누가 토를 달 수가 있단 말이냐? 품 안의 자식이지 둥지를 떠난, 아니 기꺼이 떠나보내야 하는 자녀들을 가로막는 부모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민을 와서 외국에 살면 다양한 국적의 사위와 며느리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넘어야 할 관문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언어를 비롯해서 문화, 음식, 사고방식, 청소 안 하는것 등등.

영어권에선 그나마 말은 약간 통한다 해도 그 외의 다른 언어를 쓰는 자녀들의 배우자와의 관계는 거의 외계인을 만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초창기 미국 이민자들인 1세대 부모들의 대부분은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영어 습득에 방해가 될까 봐. 결과는 수많은 바나나 양산.

그래서  아이들의 영어와 부모들의 콩글리쉬로 인한 웃픈 에피소드 때문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은 영어로 묻고 부모는 한국말로 답하고.

그렇게 소통이 안 되는 와중에 2세들의 결혼문제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인종 차별이 많이 일어났다.

'멕시코인까지는 봐줘도 제발 흑인만은 데려오지 말라'는 한인 부모들의 통사정이 은밀히, 아니 노골적으로 퍼지던 때도 있었다.


 나의 유년기에 사용하던 크레파스(색연필)에 보면 핑크와 연분홍이 섞인 색깔에는 '살색'이라는 이름을 쓴 겉종이로 싸여있었다.

같은 황인종의 '살색'을 가진 중국계 화교가 발을 못 붙인 나라가 한국이었다.

세계의 곳곳에 꾸질스럽지만 돈이 왕왕 돌아가는 차이나 타운이 도시의 제일 노른자 땅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서울의 금싸라기 땅이었던 북창동, 소공동에서 세를 키워가던 화교들이 무참하게  쫓겨나 버린 역사가 있다.

 타인종에 대한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관념을 그대로 장착한 채 한국을 떠난 이민자들.

  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나의 친척들 중에 자손들의 배우자들은 80%가 외국인이더라. 환경과 세월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후암동에서 태어나서 10년 가까이 살았다. 후암동은 용산 미군 부대와 가까와서   

미군들을 상대로 일 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하교후에 골목길을 지나가면 빼꼼히 열린 나무 대문 사이로 늦게 까지 자고 일어나서 마당 수돗가에서 여러 명이 웃고 떠들면서 양치질하고 세수하는 아가씨들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 집에 백인이나 흑인 병사들이 드나들고.

난 어릴때 이미 여러 색깔의 '살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살색'은 상징적으로도 그 당시 한국인의 인종에 대한 편견이 배어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국경이 있다한들 외국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니는 요즘 같은 시대에, 특히 북미에 거주한다면 모든 경계를 헐고 자유로운 마인드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인생이 계획대로 안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허물지?


아무튼 그 시어머니는 필리핀의 p가 싫어서 피자는 꼴 보기도 싫다고 했다. 대수술 후에도 마취 풀리자마자 피자를 찾을 정도로 유난히 피자를 좋아하던 사람이.

필리핀 며느리는 한국에서 '시'자가 싫어서 시금치를 안 먹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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