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호수 같은 나라
누구나 수술은 두렵다. 그렇다고 수술을 해야 하는데 때를 놓치면 큰 병으로 번지니까 적기에 해야 한다. 차례를 기다리느라고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 새치기를 한다면 짜증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캐나다 병원에서 수술하기 위해서 2년을 기다리라고 한다면 그건 누가 새치기를 해서 늦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한 병이 아니고 가볍기 때문에 순서가 늦어지는 것으로 알고 느긋하게 기다린다.
그러다가도 운이 좋으면 빨리 할 수도 있는데
패밀리 닥터한테 어떻게 이렇게 빨리 됐냐고 물어 보면 자기도 모른다고.
시스템 안에서 돌아갈 뿐이라고.
응급실은 피가 철철 나지 않는한 안 가는게 낫다. 초저녁에 응급실에 가면 새벽에나 의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중병이 발견될 경우에는 지체없이 처리를 해 주지만 별 이상이 없을 때는 타이레놀을 권하는데 희한하게도 의사 얼굴을 보고 이상 없다고 하면 금새 통증이 없어지는 것은 나만 그런가?
남편이 10년을 고생하다가 3년 전에 bone spur 때문에 3년을 기다린 끝에 한 달 전에 간단하다지만 척추수술을 받았다.
수술시간은 20분에다가 마취 등 합쳐서 1시간 반 만에 회복실로 왔는데 마취가 깨자마자 아프던 다리가 가벼워졌다고.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다 못해 웃겨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수술 전날 병원에 가서 항균 스폰지 두 개를 받아왔다. 하나는 수술 전날 밤에 샤워를 할 때 쓰고 나머지 한 개는 수술 당일에 샤워할 때 쓰라고. 수술을 포함한 병원비가 무료인 만큼 병상을 아끼는 것이 의료비 절감이 된다는 이론에는 충분히 동의를 하지만 이건 뭐지?싶더라.
수속을 할 때도 수술 후에 혹시 입원을 하게 되면 일인실은 190불, 이인실은 160불, 사인실은 무료라며 사인실을 사용하려면 정부에서 비용을 낸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의사는 간단한 수술이므로 입원이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병원에 가서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서 간단한 검사를 한 후에 수술실에 갔더니 핑크와 연두로 색칠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유아원 분위기의 방에서 담당의사가 와서 농담을 좀 하면서 환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가버리자 마취의사가 와서 데려갔다가 1시간 반 만에 회복실에서 눈을 뜬 채로 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저녁 6시에 수술을 해서 하루 있다 가라는데 깜짝 놀랐다. 산모들도 정상 분만을 하면 하루 만에 토스트에다 찬 오렌지 주스를 한 잔 주고 퇴원을 시키는데 웬 병실 인심이 이렇게 좋으냐고 의아해 하면서.
다음날 오전에 퇴원을 하는데 이번에는 밴드에이드 2개와 가위를 주었다.
10일 동안 사용할, 거즈가 붙은 밴드에이드와 패밀리 닥터에게 가서 스테이플스를 뽑을 때 사용할 가위라고.
아니 그럼 닥터 오피스에 가위가 없단 말이냐고?
내 눈으로 확인을 하고야 말겠다는 신념에 차서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가위를 어디에 구비를 해 놓았겠지만 우리가 가져간 가위로 다 뽑고 나서 뽑힌 스테이플스를 기념으로 가져가겠냐고 묻는 것이 압권이었다. 물론 정중히 거절은 했지만.
며칠동안 만화의 세계에 다녀온 듯, 웃을 일이 1도 없는 캐나다에서 실컷 웃어 보았다.
친구의 남편도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제거하러 갔더니 수술실은커녕 린넨이 잔뜩 쌓인 창고 같은 곳(처치실이 겠지만)에서 세워놓은 채로 종기를 도려 내고 그 자리에 거즈로 채워놓은 것을 보니 세상에, 엉덩이의 반을 도려낸 것 같았다나?
그래서 속으로 씩씩대면서 후진, 후진 나라 했었는데 그 다음에 몇 번 소독을 하고 후처리를 하는데 얼마나 꼼꼼하고 친절하게 해 주는지 간사하게도 캐나다 의료 시스템에 정이 들었다고.
병원 입원 시에 외부 간병인 제도는 없어서 한국처럼 한 달 입원비가 200만 원이면 간병인비가 300만 원이 들어가는 시스템은 아예 없다. 배변처리부터 쳌업까지 모든 걸 너무나도 친절한 간호사와 간호 조무사가 처리한다. 간병인은 커녕 방문객도 한 번에 한 사람씩만 허용된다고 사인을 붙여 놓았다. 그래서 주위 사람 중에는 이런 차분한 병원다운 병원에 가서 의료진들의 친절함 때문에 마음이 놓여서 이민생활에 적응을 한 사람도 있다.
많은 캐나다 의사들이 돈을 엄청 많이 주는 미국으로 간다지만 여기서도 전문의에게 첫 해 연봉을 22만 불 정도 주니까 괜찮은데 세금을 40% 이상 내야 해서 그런지?
병원 치료 및 수술은 모두 다 무료이고 암이나 급한 병들은 빛의 속도로 처치를 해 주니 더 이상 바라면 욕심이지.
비싼 병원비 때문에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고 치료를 못 받아서 죽어가는 경우는 없다. 대신 진료 순서 기다리다가 죽는다는데?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이면 국가가 해 줘야 하겠지만 고맙기만 하다고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인건비와 모든 사회 간접비용이 비싼 나라이고 대부분이 세금으로 충당되는 나라이니 몸조심을 하고 미리미리 관리를 해서 병원신세를 지지 않는 것이 최상책인 듯. 무리하게 런닝하다가 인대가 늘어날지언정.
'자연의 청정 이미지'하면 미국보다 단연코 '캐나다'가 먼저 떠 오른다. 미국은 남쪽으로 사막지대도 많아서 다양한 지형이지만
캐나다는 북쪽으로 뻗어 있어서 겨울이면 빙하, 여름이면 짙푸른 침엽수가 머리숱 많은 사람처럼 빼곡하다.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 여행을 하다 보면 차창을 통해 보이는 것은 오로지 산, 나무, 산, 나무뿐.
록키산맥 근처에 오면 그야말로 만년설로 덮힌 절경의 산맥과 하늘을 찌를듯한 원시림으로 둘러 쌓인 호수에 눈이 부실 지경이지만 횡단을 마치면 푸르름에 거의 멀미가 날 지경이 된다.
그렇게 나무가 많은데도 개인도 집의 나무 하나를 베어 버리면 그 대신 작은 나무라도 하나를 심어서 숫자를 맞추어 놓아야 한다나?
내가 살던 집을 지금은 큰 아들 네가 살고 있는데 뒷마당이 호수를 끼고 있다.
겨울이면 그 호수에 오리들이 많이 날아온다.
몇 십 마리가 우글거리는 것을 보면
사실 닭고기보다는 오리고기가 더 기름이 없고 쫄깃하다는 것이 왜 갑자기 생각이 날까?
개인 호수가 아니라 나라 호수이기 때문에 오리 한 마리를 잡은 것이 걸리면 한 마리당 만 불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그 동네의 터줏대감이 뻥 섞인 경고를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도가 지나친 자연보호 때문에 길거리의 하수구에도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못 버리도록 하수구 테두리에 물고기 표시를 해 놓았다. 하수에서 물고기가 살 수도 있다는 그 사인은 담배갑에 해골 표시로 위협하는 것보다 더 강력해서 감히 쓰레기를 발로 밀어서 하수구에 넣는다든지 장난이라도 담배꽁초를 멀리서 하수구 구멍을 겨냥해서 넣는 일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다.
선진국이란 규제가 많고 규율이 엄한 것이 특징이다.
세금이 높고 벌금도 많이 부과하는데 그것을 지키는 것은 사람들의 도덕심과 윤리의식인데
실제로는 양심이 제일 영향을 미친다.
벌금을 안 내려고 행동을 조심한다 해도 남이 안 볼 때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다.
법망만을 피하면 된다는 생각이 과연 사회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물리적이고 강제성이 있는 것은 언젠가 사소한 이유로 봇물 터지듯 무너지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
내가 한때 살았던 터키는 유럽화 된 국제 도시인 이스탄불과 그 외의 지방을 '이스탄불 공화국'과 '터키 공화국'으로 부른다. 온갖 유행과 캐나다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유럽 브랜드가 넘치는 도시에서 스카프로 꽁꽁 싸매는 여성들도 여름에는 탱크탑을 입고 히잡에다 샤넬 선글라스를 쓴 멋쟁이들로 넘쳐나는데 아무리 관습과 전통으로 묶어도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은 여성의 본성이 꿈틀거리는 것은 막지 못하나 보다. 내가 살 때만 해도 일간지의 첫 페이지에 왼쪽은 심각한 정치, 사회 기사로 채워져 있는데
오른쪽 1/4면은 수영복 입은 글래머인 여배우 사진이 나온다. 말이 좋아 수영복이지.
폐쇄적인 사회에서 왜 그런 것은 허용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남성 전문 정보지도 아니었건만.
뭐든지 억지로 규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
또한 언제 폭발하지 모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모든 것이 느리고 조용히 각자 삶을 즐기며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유유자적 살아가며
자랑할 것도, 그다지 없고 부러워 할 것은 더더욱 없는 나라, 캐나다.
물건이 다양하게 없으므로 있던 물욕도 사라지게 만드는...
권력이나 명예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만 모여서인지 정치인이 제일 인기 없는 직업 중의 하나이다.
투명한 재정 공개와 높은 시민 의식때문에 잔잔한 호수와 같아서 안전한 것 같기는 한데 뭔지 모르게 지루하고 인간미가 없는 로봇 사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그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이는 것을 보고 쾌감을 맛보고 싶은 일탈의 마음이 잠시 잠깐 생길 때도 있다.
그러다가도 운전을 하면서 비보호 좌회전에서 절대로 빨간 불에 돌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린다. 빨간불에 지나가다 걸리면 벌금이 900불이다.
거리에 지천인 산딸기를 따서 잼을 잔뜩 담는
아줌마들도 안 걸려서 그렇지 그것도 불법이고 고사리,송이버섯을 심심 산골에서 캐어 나오다 밑에서 딱 기다리고 있던 산림청 사람들에게 자루 채 뺏기고 벌금 내는 허무한 나라.
자기 집 앞마당의 잔디도 안 가꾸면 동네에서 무지하게 눈총을 주고.
이래저래 규제와 법으로 무장된 사회가 선진국이라면 캐나다는 그 범주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