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스 강 Aug 09. 2019

이스탄불의 개

개똥밭에 굴러도

터키에 살다가 캐나다로 돌아오기 전에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본 말 중의 하나는

'캐나다에 가시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라는 질문이었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튀어나온 나의 대답은 '산책을 실컷 하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터키에는 산책로도 변변치 않을 뿐만 아니라 도시의 난개발로 도로들이 꼬불꼬불, 울퉁불퉁 난리도 아니었다. 언덕이라는 뜻의 '테페'라는 동네 이름이 많은 것처럼 비탈과 경사가 많다. 제일 적응이 안된 것은 길거리의 개들이 싸놓은 개똥 때문에 밖에 나갔다 온 날에는 꼭 신발 밑창을 검사하는 게 일과였다.

내가 살던 신도시는 다운타운에서 멀리 떨어져서 개발된 동네인데 이상하게도 시내보다 유난히 개가 많이 돌아다녀서 이유를 알아보니 고속도로가 있어서 시내로 넘어오지 못하게 시내에 있는 개들을 이 동네로 많이 몰아 놓았다고 신빙성 없이 들리는 이유를 동네 아저씨가 알려 주었다.


터키 음식은 다 맛있는데.


개들도 조그만 애완견 수준이 아니라 사냥개같이 우람하고 털도 번지르르하면서 어찌나 건강상태가 좋은지 말도 못 한다. 사람들이 다니는 한낮에는 골목의 여기저기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밤에는 활보를 하는데 자기네들끼리 영역 싸움을 하는지 계속 짖어대면서 떼를 지어 몰려다다. 사람을 물지는 않지만 그 덩치들을 보면 좀 위협적인 데가 있어서 나같이 어릴 때 집에서 키우던 '쉐퍼드'종의 큰 개에게  물려서 혼이 난 사람은 주춤주춤 하며 피해 다니곤 했다.

그래서인지 개라면 별로인데 아주 개판인 동네에서 몇 년을 살면서 개 무리에 질리기도 했을뿐더러 제일 불편한 것은 역시 동네 산책이었다.

캐나다의 많은 도시 중에서 밴쿠버는 록키 산맥의 밑자락에 있어서 소문난 청정지역이다.

수많은 공원과 우거진 숲, 울창한 나무들이 마음의 찌든 때를 말끔히 벗겨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는데.

그래서 아무 때나 집 앞을 나서면 다 공원이요, 숲길이니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을 만끽하다가 이스탄불에서는 개똥으로 뒤덮인 거리를 보면서 한숨만 쉬곤 했다.

 

그래도 날씨가 건조한 사막기후라서 냄새는 많이 안 나는 것 같았는데 밴쿠버에서 이스탄불을 방문했던 아이들이 도착 첫날, 어디서 구린내가 난다면서 코를 킁킁거리는데 아마 개똥 때문 일거라고 말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개똥이 없는 곳에서 실컷 산책을 하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절실한 소원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일이 있어서 밴쿠버에 잠깐 다니러 오면 고속도로의 공기조차  어찌나 맑던지 와와 감탄

절로 나왔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면, 돈과 명예 등이 충족된다 해도 험하고 거친 자연환경 속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쉴 곳을 잃어 심성이 피폐해지는 것만 같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어 여유를 잃고 사나워지며 뭔가 욕구불만이 생겨 표정도 일그러지게 되고. 물론 도전정신과 함께 아드레날린도  동시에 솟구쳐 오르겠지만.


인도에 주재원으로 나가 있던 시동생이 살았던 동네에는 길거리에 소가 우글거린다고 했다.

'성스러운 소'라는 의미의 성우 숭배에 반해서 불평등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인 '수드라'보다 더 밑에 있는 불가촉천민인 '달리트'계층은 사람대접조차 못 받는다니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보다 소가 더 우대를 받는다고.

중동의 유목민들은 높은 기온에서 빨리 상하는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종교적으로 금하는데 힌두교는 소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농경민족의 특성상 소를 신성시하는 사상을 종교적으로 고착시켰나보다.


덩치가 큰 소들이 어슬렁거리는 것보다 이스탄불의 개들은 오히려 애교스럽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기를 인간의 두 가지 비극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것'과' 갖고 싶은 것을 갖는 것'이라고.

어쨌거나 나는 밴쿠버로 돌아와서 제일 고 싶었던(?) 산책을 신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도 시간이 갈수록 개 문제가 심상치 않은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개들을 운동시키고 배변을 위해서인지 이른 아침에 부스스한 채로 나오는 것을 보면 개를 끌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에게 끌려 나오는 것 같다.


 동생이 동부로 이사가면서  14년 동안 키운 개를 동물보호국에 연락해서 데려가는 과정에서 드라마 한 편 찍었다고. 직원이 와서 개 상태를 보고 주인과 인터뷰를 하고 두세 번 방문을 해서 개와도 친해진 후에 서류를 작성해서 어떤 집으로 가는지 설명해 주고 떠나는 날은 큰 고깃덩이를 주면서 유인해서 차를 태우는데 그 개가 뒤도 안 돌아보고 고기를 따라가더라고.  

무려 14년을 애지중지 키운 개주인인 조카는 울고불고 하는데. 괘씸한게 처음 온 느낌이고 나중엔  짠하더라고.

 에 들으니 그 개도 동부의 어느 혼자 사는 서양 할머니네로 가서 잘 있다나. 그 개는 내가 알기론 재롱보다는 사나워서 시도 때도 없이 짖는게 주특기. 그런데 희한하게도 서양 사람을 좋아했다나. 그렇다니 서양 할머니가  코에 돋보기를 걸치고 퍼즐을 푸는 의자 발치에서 얌전히 있 '쪼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자손을 낳는 것이 순리라고 알았던 것이 이제는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린 듯 자식은커녕 결혼조차 버거워하면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는 싱글들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개나 고양이를 키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람끼리는 비위를 맞추고 싫어도 참아야 되며 늙으면 병시중까지 해야 하는 반면에 말은 못 하지만 어느 정도 교감이 되고 어린애 하나 있다 생각하고 예뻐해 주기만 하면 배나 예쁜 짓으로 마음을 녹이니 안 키울 재간이 없다네.

그리고 외출을 해도 그냥 놓아두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토 달지 않고 반가워서 깡충깡충 뛰는데 사람은 나가기 전부터 음식부터 해 놓고 나가서도 마음을 졸이고 시간을 체크하다가 돌아오면 집에 있던 사람의 표정이 썩 좋지만은  보이는 쓸데없는 자격지심까지 곁들여지니.


바야흐로 '애 키우기'보다 '개 키우기'를 더 선호하는 세상이 온 것 같은 이면에는 사회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류가 존재하는 한,  난해한 문제들이 정답이 아닌 해답을 기다리고 있겠지.


참,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라는 농경사회에서 유행하던 낙관적인 인생관을 표현하는 옛말에 대해서 쓰려는  것은 아니었다.

 


작가의 이전글 외국에 살면서 제일 많이 받아 본 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