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스 강 Aug 02. 2019

외국에 살면서 제일 많이 받아 본 질문

직업이 뭐예요?

이민 오기 전에는 물론이요, 이민을 온 후에도 한참 동안은 전업 주부였다.

house wife라고 하면 캐나다 여자들은 다들 부러워하며 'lucky'라 부러움이  섞인 어조로 말하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부러워 하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북미에서 살면서 점차 여기 생활이 외벌이로써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알았다. 집을 사든 지, 렌트를 얻든지 달 일정 비율의 집과 차에 대한 경비가 나가야 하고 생활비가 있어야 하니.

한 사람이 벌어서 집과 차, 또 한 사람이 벌어서 생활비, 이렇게 해야 굴러가는 구조이다.

알바를 해도 워낙 거리가 머니까 차가 있어야하니 중고차를 끌다 보면 수리비가 더 나와서 돈 버는 것도 힘이 들고 저축은  그야말로 꿈일뿐.


한국에서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울 때만 해도 다들 전업 주부였지 맞벌이 부부는 별로 없는 시대였다.

여자로서 학교 선생님은 권위도 있고 방학도 있어서 괜찮은 직업이었다. 그 외의 얼마간의 전문직 외에는 대부분이 결혼하면 싱글 때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살림만 했었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카페도 흔치 않아서(억울) 남편 출근 후에는 같은 아파트의 엄마들끼리 집에  모여서 조제 커피를 마시고 생활 정보를 교환하며 시집, 친정에 대한 고민과 애환을 나누곤 했지.

그러다가 이민을 와서는 아이들이 영어가 딸리니까 집에서 애들만 봐주었다.

 특히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하교 시간이 오후 2시 55분 것이 제일 적응이 안 고 어이가 없었다.

덩치가 산같은 고학생이라도 자전거나 버스로 통학하지 않는 애들은 부모가 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한다. 그 픽업이 제일 큰 일인데 직장 다니는 부모들은 어떻게 그 일을 하는지 지금도 미스터리이다.

          형이 교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생


그리고 항상  '너희들은 이민자라서 원어민들 보다 세배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라고  애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입을 했건만 다 시간이 가야 해결되는 것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초조해서 애들을 달달 볶았는지 모르겠다.


기나긴 이민 생활을 통해서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다 컸을 때 캐나다에서 나름대로 직장생활도 해 보고 터키에서 비즈니스도 해 보았다.

한국인 회사에서 한국말을 하고 한국 마켓에 가고 한국 식당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영어와는 거리가 먼 이민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이스탄불에서 사업을 하려니 터키어가 필수였다. 우랄 알타이어족인 터키어가 알파벳으로 되어있어서 몇 가지 예외만 알면 배우기는 쉬운 말이다. 여행은 한 번쯤 가기가 좋은 나라이나 외국인이 살면서 일을 하거나 사업을 하기엔 제약이 많은 나라이다. 특히  서류에 관한 bureaucratic 일 진짜 쩔더라.

이스탄불의 아타투르크 공항에서 입국시에 얼굴도 안 보고 스탬프 쾅쾅 찍어주는 호기 내지는 신속함은 다 어디가고 제출한 서류가 돌아 나오기를 반평생은  기다렸던 것 같다.

터키에서 일상사의 정답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고 나중엔 된다.   얼마나 푸근한 말인가.

속은 다 타 들어갈지언정.


유목민족으로써 땅을 정복을 해야만 삶의 터전이 생기므로 이재에 밝고 돈에 대해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입에 있는 것도 뺏을 정도로 이악하다고.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과 인정이 넘치 낮은 물가와 유적들로 볼거리가 무궁무진하지만 남의 땅에서 얕은 뿌리라도 내리려면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다. 그렇게 두 번의 이민 아닌 이민을 통해서 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운 이민의 삶으로 예민해지고 얇아진 신경줄로 인해서 오늘도 만만치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이다.

  


캐나다 생활이 그렇듯 정장할 일이 별로 었어서 기승전 후드티와 청바지나 레깅스로 끝난다. 붙박이장을 열어 보면 이민 올 때 가져온 옷들이 꽤 있을 것이다. 입기에는 유행이 지났건만 감이 너무 좋아서 못 버리고 어떤 것은 기념으로 혹은 아끼는 것이라서  몇십 년을 옷걸이에 걸어놓은 옷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면 그냥 애지중지 끼고 있을 수밖에. 이 많다고 골고루 다 입는 것도 아니고 적다고 멋쟁이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코디에 신경만 좀 쓰면 캐나다에선 패션 피플이 되기가 수월하다. 다들 외모에 신경을 별로 안 쓰니까.


가구는 또 어떤가?

임시로 IKEA에서 가벼운 가구를 쓰다가 주택으로 이사를 가면 그 가구들이 갑자기 조잡하고 애들 소꿉 장난감처럼 느껴져서 무겁고 중후한 가구를 들여놓게 된다. 주택의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빈틈없 신나게 채우다 보면 집은 어느새 짐으로 꽉 차 버린다.  새로운 집이다 해서 있는 가구, 없는 가구 다 배치하고 자투리 공간에 놓을 소품을 사들이다 보면 집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게 된다.

 밴쿠버의 넓직한 나무집에서 겨울에는 집 전체 난방을 못 해서 으슬으슬하고 을씨년스럽게 지낸다. 그래서  온 가족이 방 한 개만 난방을 하고 한 방에서 지내는 집도 있다. 가구가 많다고 집이 따뜻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집을 채울 가구 사 들이는지.

                            미니멀한 나의 부엌


여자들의 그릇 욕심 또한 끝이 없어서 예쁜 그릇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 우스갯말로 시어머니가 죽으면 며느리가 투덜거리면서 시어머니의 사자어금니처럼 아끼던 그릇들을 투덜거리면서 아낌없이 내다 버린다고 한다.

절대로 젊은 취향도 아니고 유행에 뒤떨어진 그릇들을 식탁에 놓기도 두려울 것 같다.


나의 모토는 small,simple, slow이다.

인간이 쉴 새 없이 집착하고 욕심을 내다 조절이 안 되는 탐욕으로 치닫는 일은 이처럼 작은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복잡한 세상에서 마음이 쉼을 얻고 편안함을 느끼고 싶다. 집까지 정신 사나운 물건 보관소 내지는 창고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남편이 밥 먹기 전에 산책하자고 하면 나는 밥 먹고 하자는 등 사소한 것조차도 맞는 게 거의 없지만

단 세 가지, 그린색을 좋아하는 것, 팥이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는 것 그리고 정리 정돈과 청소를 좋아하는 것의 공통점으로 40년 이상을 살아왔다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청소 이전에 정리가 필수이므로.

짐과는 거리가 먼 결혼 생활이었다고.


짐이 정말 삶에 짐이 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다.


외국에 와서 제일 많이 물어보는 것이

 '직업이 뭐냐'라는 말을 이제야 하네.

서양 여자들도 일을 하고 자신의 꿈을 성취하려는 것도 있지만 여기에서 일의 강도가 만만치 않아서인지 '전업 주부'를 속으로는 부러워하는지도 모른다. 러나 서양 체질이라서 체력은 좋은게 사실이다. 전업 주부도 해 보고 직장 생활도 해 보고 돌고 돌아서 은퇴를 하고 나서 요새 에게 새로운 직업(?)이 생겼다.

별 것은 아니고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사는 법'의 상담이랄까? 이따금씩 물어보고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집이나 살림이 젊고 신혼집 분위기 같냐는 찬사와 함께.

예를 들면 내가 옷을 하나 사면 입던 옷 중에서 한 두 개는 버리기 때문에 항상 옷장이 같은 볼륨을 유지한다든지, 부엌에서 baking을 안 하면 과감하게 오븐을 없애고 서랍장을 넣어서 수납공간으로 쓴다든지 하는 팁을 준다.

아이디어가 너무 좋다고 나 보고 와서 자짐을 정리해 달라고 조르더니 막상 날을 잡으라고 하면 '에이, 와서 보면 욕할 거야, 아니 기절할거야, 너무 짐이 많아서'하면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몇십 년전 이민 올때 가져온 이민 짐,  한 컨테이너는 풀지도 않은  그 친구 지하실의 비밀을  나는 알고있다.


청소하기가 힘든  식탁의 요란한 샹들리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크리스탈 조각의 먼지는 어쩌면 좋아.



작가의 이전글 추억의 미국 비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