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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Sep 12. 2019

오래된 짜장면 집

항상 금싸라기 땅의 차이나타운

내가 어릴 적에 살던 동네에 '사O루'라는 중국 음식점, 즉 짜장면집이 있었다. 입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큰 간판은 거무틔틔한 짙은 갈색 바탕에 용무늬가 요란한 가운데 상호의 황금색 글씨가 하도 요란하고 선명해서 주위의 남루한 것이 다 묻혀버리는 그런 음식점이었다.

주인 남자는 덩치가 비대하고 능글능글한 반면에 부인은 키가 크고 삐쩍 마른 데다가 늘 힘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그 당시에는 공중목욕탕이 동네마다 있었는데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은 기껏해야 명절 때나 한 달에 한 번쯤 갓 유행이 된 플라스틱 목욕통 바가지에 비누, 빨간 이태리타월 등 목욕용품을 담고 목욕탕 나들이를 하곤 했다.  남탕의 할아버지들이 구성지게 뽑는 창소리도 다 들리는 그야말로 이웃 친화적 구조였다.

모르는 사람과도 서로서로 등의 때를 밀어주는 동안 욕조의 때가 둥둥 떠다니는 오후 무렵이 되면 목욕탕 주인아줌마가 큰 잠자리채 같은 뜰채로 물 위에 떠 있는 때를 휘휘 걷어 내곤 했다.

내가 목욕탕에 가면 그 중국집 아줌마가 왔나 안 왔나 살펴보는 것이 일이었던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모습이 너무 기괴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전족(foot binding)때문에 발육되지 못 한, 

대 여섯 살 정도 아이의 발 크기에다 뼈 만 남아서 쇄골이 드러난 앙상한 상체에다 엉덩이에 살이라곤 없는 데다 엉치뼈의 꺼멓게 변해버린 피부가 반점처럼 보이던 몸.

게다가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고립된 표정으로 힘이 없어서 가까스로 바가지에 물을 퍼서 천천히 몸에 끼얹던 모습이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 모습에 이질감을 느껴서 그녀에게서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져서 앉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녀는 무슨 병이 있었는지 얼마 못 살고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날에도 가게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그 남편을 동네 사람들이 '돈만 아는 지독한 뙈놈(그 당시 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이라고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음식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아서  동생은 그 집의 월병 맛을 못 잊어서 중국인들이 많은 이 밴쿠버에서 그 맛을 찾아 헤매도 아직 못 찾고 나는 지금도  그 집의 촉촉하면서도 고소했던 군만두 맛을 죽어도 잊지 못하고.


골목마다 무슨 '루'니 '춘'이니 하는 중국집들이 동네를 형성하는데 꼭 필요한 구성요소처럼 자리 잡고 소위 철가방으로 배달하는 짜장면과  짬뽕이 한 시대를 풍미한 적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배달을 시킬 뿐 별로 식당 안에 들어가서 먹지는 않았다. 손바닥만 한 공간에 두세 개의 테이블에 앉기도 협소했거니와 나무젓가락의 종이 껍데기가 흩어져있는 지저분한 바닥과 잘 닦지 않아서 고춧가루가 잔뜩 묻어있는 식초 통과 집기들, 군데군데 찢어진 형광색에 가까운 물색 비닐 의자들의 누추함 때문에 꺼림칙했던 것도 있으리라.

그래도 갑자기 손님이 오거나 졸업식날 같은 때엔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에다 탕수육,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시면 양장피 같은 요리(?)가 추가되어 먹는 날은 정말 복이 터진 날이었을 정도로 우리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했던 향수의 중국 집이었다.

특히 배달하는 총각(기껏해야 14~15세 정도)이 빈 그릇을 수거해 가다가 동네 아이들이 노는 곳을 지나쳐 가면서 한창 놀 나이에 일을 해서 심통이 나서 그랬는지 짓궂게 발로 흙을 차서 아이들을 울리고 가기도 했다. 그가 지나갈 때 그의 몸에서 풍기던 시큼털털한 단무지 냄새와 때로 찌든 옷에서 나던 퀴퀴한 냄새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년가장의  냄새였으리라.

중국인 주인 밑에서 배달부터 해서 짜장면 기술을 배워 중국집을 차리겠다는 소년들의 꿈이 땀으로 변해서 절어 있는.

이 비즈니스야말로 중국인과 한국인이 한국 내에서 함께 만들어간 초창기의 한, 중의 국제적인 사업모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197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에 북창동의 화교학교를 졸업한 화교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화교가 번영은커녕 발을 붙이지 못하고 많이들 떠나가 버렸다. 다시 중국 교포들이 들어 옴으로써 인천의 차이나타운이 번성을 하고는 있지만 그 당시에는 화교가 발을 못 붙이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인 것처럼 보도된 적이 있었다.


세계의 어느 곳을 가든지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그들은 중심가를 좋아하고 거기에 자리를 잡는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 금싸라기가 되어서 알부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밴쿠버에도 Main스트릿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오리지널 차이나타운 외에도 신흥 차이나타운이 된 Richmind에는 마치 중국, 타이완, 홍콩에 온 듯 그곳의 음식과 풍물이 없는 이 없다.

토론토의 경우도 Spadina와 Dundas에 있는 오래된 곳 이외에도 신규 이민자들이 토론토의 북쪽 도시인 Markham에 신흥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이처럼 세계의 구석구석에 자기네만의 문화를 간직한 타운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그들에 비해서 한인 이민자 수는 적지만 이제는 북미의 소도시에 한인 마켓과 한인 타운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다.

 K가 붙는 새로운 브랜딩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올 새로운 decade에는 기존과 다른 엄청난 기술의 시대가 열릴 것이니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 흩어져 있는 이민자들의 자녀들이 이루어낼 새로운 이민사 기대해 본다.

 AI같은  획기적인 기술 인해 새로운 직업군들이 생겨나고 지금 잘 나가는 직업들은 테크니션으로 남아 있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는 엄청난 변화 예고되고 있다. 가 보지 않은 길에 삶이 격랑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 불안과 새로운 세계에로의 초대장을 받은 것같아서 흥분도 된다.


나의 외국살이에서 제일 생각나는 음식은 짜장면이라서 몇 년 전에 한국에 갔을 때 구와 중국집에서 이틀 연거푸 짜장면만 먹었다. 한식 뷔페가 새로 오픈한다면서 외국에서 한식에 굶주렸을 나를 생각하고 다양한 한식을 먹이려고 가고 했는데 단칼에 거절을 해 버다. 에 살기 때문에 더 김치를 찾고 죽어라고 한식만 먹는 사연을 모르는 친구. 그 친구가 터키 우리 집에 놀러 올 때. 내가 부탁한 한국 식품을 사서 한 트렁크를 담으니까 친구 남편이 식품 행상 떠나냐고 물어 보았다고.  짜장면이 물릴즈음 생각나는 것이 떡국과 김치찌개 순이다.


중국인이 많이 사는 밴쿠버에서 어릴 때의 짜장면 집을 생각하면서 추억팔이를 해 보았는데  이민자로서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서 차이나타운이나 한인 타운 등이 어떻게 변할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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