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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Mar 09. 2021

나 E대 나온 할머니야

외국에선 초졸도 아닌 무학

미국 이민사의 초창기에는 300불 만 들고 온 사람들, 남미로 이민 갔다가 우회해서 미국으로 들어온 사람들, 미국 유학으로 와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서 취직해서 눌러앉은 사람들까지 여러 형태의 이주자들로 이민 사회가 형성되었다. 유학하면 미국이 대세이던 1950년, 60년대에는 미국 박사면 한국에서 우대할 뿐만 아니라 개발 도상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들을 정부에서도 모셔오기 바빴다.

그래서 가난한 수재들은 장학금을 받고, 부유한 집 자제들은 기부금을 내더라도 가문의 발전을 위해서 미국 대학원으로, 박사 학위 받으러 많이들 미국으로 떠났다. 결혼 적령기가 낮을 때였고 공부를 마치려면 몇 년이 걸리므로 결혼을 해서 떠나기도 했다. 최고의 규수 감,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표현인 재색을 겸비한 신붓감이 제일 많은 학교가 바로 E 대였단다. 재와 색을 겸비한다는 게 뭔데?

요즘이야 학폭때문에 고교 졸업 앨범을 구한다는데 그 당시에는 시어머니 감들이

 며느리 감 사진을 스캔하느라고 졸업 앨범을 구했다고.


그렇게 완벽신부를 대동하고 미국에 온 많은 유학생들은 식당에서 접시 닦기로 알바를 뛰고 새색시들은 그 당시 번창했던 가발공장이나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그래도 한국에 뿌리를 둔 그녀들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서 대학 동창회에서 잠시 회포를 풀고 학창 시절을 느끼려고 동창들을 만나던 일들이 가장 즐거웠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남가주, 북가주에서 대학 동창회들이 왕성하게 모이고 있다. 그 당시 남편들에게 힘이 되고자 알바도 뛰었던 새댁들이 이제는 노령의 파파 할머니들이 되었으리라. 고교, 여고, 대학, 여대, 해병대. ROTC 등 숱하게 많은 동문 모임 중에서 가장 가짜 졸업생이 많은 학교가 E 대라고 한다. 그래서 가짜 졸업생이면 서로 얼굴을  붉히다가 슬며시 사라진다고. 그렇게 인기가 많은 것 까지는 좋다고 치자.

그런데 한국에서는 학벌위주의 사회라서 좀 인지가 된다 해도 이민을 와서 낯선 땅에 떨어지면 진짜 '와일드 애니멀 팍'에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잡아먹든지, 잡혀 먹든지. 단 그런 각오를 안 하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어찌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던 사람들은 적응도 못 하고 쉽게 살아 보려다가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도 많았다.


이민 생활이 길어질수록 여자들이  E대 나왔다는 말 하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게 된다. 특히 영문과 나온 사람은 국문과(영어 나라니까) 나왔다고 하고 지금은 웃기지만 옛날에는 가정과라는 전공이 있어서 대부분 가정과 나왔다고 둘러대곤 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외국의 낯선 땅에서 한국에서의 전공은 살릴 수도 없고 모도 없으니 남편이 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인간승리를 이루어낸 수많은 여인들이 있다.  


영어 삼위일체를 독해 부분을 통째로 외우고 수학의 정석을 울면서 찢어 먹을 정도로 세게 공부를 했는데 단지 입시를 위한 답 풀이 위주였다. 그러다가 들어간 대학에서는 자유를 만끽하나 했더니 매일 '파리 다방'이나 '애플 다방'의 컴컴한 데서 사전에서 단어만 4년 동안 찾다가 고3 때 보다 시력이 더 나빠져서 졸업했다.


대학 정문 밑으로 기찻길이 있었는데 미팅이 있는 날 그 길을 지나갈 때 기차가 지나가면 그 날 미팅 파트너가 잘 걸릴 거라는 미신을 굳게 믿고 미팅에 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때 만났던 사람 중에 심장병으로 고인이 된 사람도 있으니 세월을 누가  일분이라도 잡아 둘 수 있겠는가. 애프터 신청을 하고 그 약속보다 미리 만나고 싶다고 집으로 전보를 보낸 이도 있었는데 그 당시 전보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해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동네를 천둥소리처럼 울렸던 그 굉음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과 대표에게 미리 내 번호를 알아서 자기 표랑 매치시켜서 아닌 척하고 짝꿍이 되어서 능청을 떨던 사람. 학교 정문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던 사람의 국립 대학교 교복이 촌스럽다고 팽하고 모른 척했던 사람이 나중에 크게 돼서 대한민국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는.


신입생 때는 그렇게 암팡지게 도도했다 쳐도 3학년쯤 돼서는 '손만 잡아도 결혼'해야 하는 시절보다는 나중이지만 결혼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람을 만나는 때였다. 미국으로 딸을 시집 못 보내서 안달하던 엄마 친구의 똑똑한 딸이 미국으로 시집을 갔다. 한국에 잠깐 나온 신랑 말만 듣고 성대한 결혼식을 하고 가 보니 원 베드 아파트에서 모친과 세탁소를 하고 있었다나. 엔지니어라는 직업부터 모든 게 거짓이었던,  미국 좋아하던 시절의 황당한 결혼 이야기가 숱하게 많았다.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신랑감과 데이트를 몇 번 하다가 국제극장인가를 갔는데 그의 전략일지 모르지만 영화는 그 무시무시한 호러물인 '엑소시스트'였다. 의심 많은 부친이 극장 데이트에 내 동생을 딸려 보냈다.  무서운 장면에서 극장 의자 등받이 위로 내 어깨를 감싸 주려는 손길이 찰지지가 않고 어째 엉성하더라니. 동생이 내 곁에 떡하니 앉아 있었으므로. 생각도 안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안 만나게 되었는데 한참 후에 이민 간다고 연락이 와서 떠나기 전날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부친이 나가보라 해서 나가는데 이번엔 젤 친한 내 친구랑 나가라고 하시더라.

K-장녀의 어쭙잖은 책임감 때문에  미국으로 시집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별로였는데 나가 보라고 하신 부친은 무슨 생각으로?  결혼시킬 속셈이 있으면 밀어주진 못 할망정 무슨 일 날까 봐 친구를 붙였으니 그쪽에선  찬스가 없다고 절망했을 수도. 그렇게 외국으로 가서 산다는 것에 주춤거리다가 지금은 그 외국에 살고 있구나.


 코로나 시대에 하도 웃을 일이 없어서 희미한 옛 기억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 보았네.


 대학교 때는 나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 지적이고 교양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학구적인  대학 캠퍼스에서 늘 책과 씨름하며 사색하고  친구들과도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관계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겠지.


결혼하고 내 살 같은 아이들의 똥 기저귀 빨며 아글타글 살다가 이민을 와서 여기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으니 무학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40대 후반에 한국계 신문사에 취직해서 직장 생활도 해 보았다.

돈을 만드는 광고 국장으로서 한 달에 15만 불 이상( 캐나다 시골에서는 대기업임) 만들고 이벤트에다 사람 만나느라 다닌 마일리지도 대단했다. 1년 반에 89000킬로를 뛴 적도 있었다. 카펫에서 신으라고 만든 비실용적인 이태리 구두로 하도 페달을 밟아대니 오른쪽 구두의 앞부분이 닳아서 구멍이 날듯 말 듯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한테 구두를 보여주면서 '이태리 구두가 이 정도로 약하다니 골 때리네. 누가 봤으면  쪽팔린 뻔했네'라고 했더니 애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 엄마~~ 그렇게 험해지셨어요?'라고 놀라는 시늉을 했다.


탄핵 운운하던 시절에 어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나를 지칭하면서 옆 사람에게 다 듣게 ' 순실 여대' 나오셨잖아 하는데 조롱도 아니고 뭐였지? 순간 E대가 쪽 팔리는 순간이었나?


이민을 오니 초졸도 아닌 무학에다가 영어는 왜 그렇게 늘지를 않는지 계속 헤매고 있다.

세월이 쉬는 법이 없이 거침없이 흘러서 은퇴 후에 외국어 공부를 하면 좋다고 하는데 영어 단어뿐만 아니라 한국어 명사도 기억이 안 나서 입안에서 뱅뱅 도는 영락없는 Korean Canadian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한국의 E대 동창들이 캐나다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보지도 않겠지만, 왜냐하면 요즘은 인터넷으로 빤히 다 알므로.

물어보면 '  이민 와서 나 개털 된 거 얘기해 줄까?'라고 말하는걸 아이들이 들으면 또 한 소리할지도 모른다.

'점점 험악해 지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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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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