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스 강 May 20. 2021

이스탄불 가는 길

여행이었기를 바라며

평화로운 캐나다의 한적한 곳에 살다가 갑자기 사막의 한 도시로 가게 되었다. 이름도 아름답고 고혹적인  '이스탄불'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훅 끼치는 낯선 공기와 냄새, 까슬까슬한 가벼움이 아닌 비릿하면서도 기름 냄새가 떠 있는 듯해서 약간의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르고 군청색 제복을 입은 공항 직원들의 무표정한 표정들이 확실히 내가 살던 곳에서 다른 지역으로 왔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입국 심사대의 작은 유리 구멍으로 여권을 내밀자 한번 쓰윽 훑어보고 도장을 쾅쾅. 관광의 나라답게 별 제재 없이 입국을 시킨다. 무조건적은 아니겠지만 여러 번 출입국을 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여느 국제공항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면세점과 세련된 전광판의 광고 및 실내를 보면 국제공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터키라는 이름 때문에 어디 후진 데가 없나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히잡을 쓴 여자들이 많은 것 외에는.


 어스름한  저녁이 서서히 깔리고 있는 이스탄불의 도로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딱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1960년대의 청계천 세운상가 동네와 흡사했다.

난개발로 저층과 고층이 뒤섞여 있고 시원한 맛이 없이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이 어찌나 복잡하고 답답하던지. 가뜩이나 처음 오는 나라에 대한 나의 쭈볐거림까지 추가되어서.


내가 거주할 아파트는 이스탄불의 외곽의 새로 개발되는 단지에 있었다. 지진대의 신축 건물답게 내진 설계가 되었다는 현수막이 빌딩 전면에서 나부끼는 것이 지진을 상기시켜서 더 무서웠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층고가 높고, 더운 나라답게 바닥은 다 대리석인지  타일인지로 깔려 있고 엌에는 냉장고나 오븐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옛날의 한국처럼 다 자기 것을 고 이사를 다니고 있었다.

지진에 대비한 아파트와 타일 부엌

 

식품점은 바로 아파트 앞에 있었고 멀리 있는 '미그로스'나 '까르푸'같은 대형 마트는 골목마다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지중해와 흑해, 에게해를 끼고 있는 터키라는 나라답게 또한 대평원과 목초지를 보유한 나라답게 과일과 야채, 생선은 풍성하다 못해 지천이었다. 한 여름의 터키산 체리가 저렴해서 한 번에 몇 킬로 씩 사서 먹곤 했는데  붉다 못해 검고 달짝지근한  과육은 천상의 맛이었다. 우유며 치즈며 올리브 오일은 순수했다.  달게 먹는 나라답게  유럽에서 들어오는 각종 과자, 초콜릿, 스낵 등의 먹거리가 넘치고 넘쳤다.

                각종 양념들

     돼지기름이 들어가지 않은 라면

         대형 마트와 셔틀버스


누가 터키를 가난한 나라라고 했는가?

부의 분배가 잘 안 되어서 그렇지 빈국은 아니다.  '터키'하면 햇빛이 쨍쨍 쬐는 사막 가운데의 낡고 나지막한 집 앞에 빨간 터키모자를 쓰고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검붉은 얼굴의 노인을 떠 올리며 참 덥고 못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었.


식당에서는 손님보다 종업원 숫자가 더 많을 정도로 인력이 풍부하고 능글맞아도 인정이 많으며 빡빡하지 않은 사회. 지금도 시골에 가면 모르는 사람도 재워주는 인심이 남아있다니.

그러나 도시의 주요 건물 앞에는 소총을 든 군인이 테러에 대비해서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시민들은 불안한 기색도 없이 군인들 옆을 떠들고 웃으면서 지나가더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며 EU에 가입하기를 원하지만 유럽에서 이 핑계 저 핑계로 받아주지 않고 있다.

세속주의에서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로 국민들을 결집시키려는 정치력을 구사하고 있다.


그들이 제일 즐겨 쓰는 '야른'이란 단어는 '내일'이란 뜻이다. 특히 돈을 주는 사람이 많이 쓴다. 줄 돈을 내일 줄게 하면서 미루는 것이 몇 년도 간다는 게 문제이다. 야바위꾼의 수법답게 치사하지만 속지 않으려고 따지기엔  날씨 조차 사기성 있게 너무 좋았다.

내가 처음 이스탄불에 내렸던 순간 느꼈던 생경하고도 낯섦이란 단어는 그 푸르고도 맑은 하늘에 물감처럼 다 풀어질 것 같은, 그래서 터키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단어.

어릴 때 보았던 분꽃이 터키에

  샤론의 장미라고 불리는 무궁화


날  우리나라 철물점이나 잡화점 같은 가게


   구옥  형태의 숙소와 카펫 가게

      신도시의 세련된 상가와 실내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그렇다.  중세 이스탄불의 겨울을 배경으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쓴 ' 내 이름은 빨강'에서 드디어 빨강이 언급됐다. 이 작품과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내가  터키는 빨갛다 못해 사방이 붉은 인상이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생선요리나 야채샐러드에도 마구마구 뿌려대는 시큼한  레몬즙의 향이 공기 중에 떠 돌다가  분말이 되어 내 머리 위로 가볍게 뿌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싱그럽진 않았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붉은 열기를 품은 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가본 적이 있는  'Nisantaş'라는  동네에서 태어난 '오르한 파묵'의 글을 보면서 터키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여러 이유로 미국에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터키의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하늘에서는 신들의 전쟁, 땅에서는 문명 간의 충돌로 인한 혼잡한 역사의 현장이라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동쪽의  족속이  밀고 들어와서 대제국을 형성하며 흘린 핏물이 지도에 번져가듯  온 유럽을 제패했던 오스만 터키 제국.  중세부터 몰락의 길을 걸으며 갈지자걸음으로 횡보를 하다가 지금은 세속주의에서 근본주의로 방향을 틀어 유럽풍에서 아랍풍으로 변해가는 나라.


내가 거주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던 이스탄불의 공기는  우호적이지도 배타적이지도 않은 중립이었다. 단지 내 마음속에 들끓었던,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몸과 마음이 경직되었을 뿐이다.

꿈이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었기를 바라며 이 지루한 여행을 얼른 마치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민은 캐나다로 한번 갔으면 됐지, 웬 두 번째 이민? 하면서 이방인의 처절한 본능을 깨워보지도 않았다. 터키에 머무는 내내 그 생각 때문이었는지 정을 못 붙이고 겉돌았다. 사람들이 나한테 적응을 못하는 게 아니라 적응을 안 하는 거라는 말까지 했는데.


코로나로 여행을 못 하니  터키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적응을 안 하고 머뭇거리던 시간 속에 다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날씨가 더워서 짜증 나고 양고기 냄새는 역하고 히잡 쓰고 가슴골이 드러난 탱크 탑을 입은 젊은 여자 애들을 보면서 '종교란 무엇인가'를 잠깐 생각해 보는 것도  아이러니하

콧수염 난 아저씨들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도 괴롭고 길가의 늑대만 한 들이 어슬렁거리는 것도 무서워서 싫고, 싫고.....


이제는 천지개벽을 해서 터키의  싫었던 모든 것이 아무리 좋아졌다해도 코로나 때문에 국경을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신세가 되니 이유 불문하고 다 그리울 뿐이네.

작가의 이전글 한 집에 아이들이 아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