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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Jan 27. 2022

아기 데리고 공짜여행

나이 제한이 있다네

비행기 안에서 젊은 아가씨가 아이 둘을 데리고 땀을 뻘뻘 흘리는 광경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할머니가 갓난아기를  업고 비행기 뒤의 캐빈에서 서성거리는데 아기는 목청이 찢어질 듯 울어대고 있고. 승무원들이 교대로 와서 뭘 줄 것이 없나 물어보는데 아기는 도리도리 하면서 주야장창 울어대니 할머니는 정신이 쏙 빠진다.


6.25 한국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나고도 지났건만 '홀트 아동 복지회'가 합정동에 아직도 존재한다. 주로 해외 입양을 하는 단체이다.

사실 한국의 정서로는 국내 입양은 마뜩하지가 않다. 혈통 중에서도 순혈주의가 강한 나라이므로. 그래서인지 해외 입양이 없던 옛날에는 '업둥이'가 있었다. 제도라고 말 하기엔 비공식적이고 은밀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겐 공개되는 입양 사례였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안이 수선스러웠다. 우리 집 앞인지 옆 집인지의 경계에 아기가 이불에 쌓인 채로 놓여있다고 한다.  보통은 이불속에 아기의 음력 생년 월 일 시와 한문으로 쓰여진 이름이 적힌 종이와 함께. 우리 집에서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애도 돌봐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작정한 일 인지도 모른다. 그 뒷수습은 어땠는지 기억은 안 난다.  미혼모가  물리적으로 돌을 맞는 시대는 아니었으나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매장되는 사회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기를 키우기 힘든 절실함에서 얻은 정보력이었는진 모르지만 희한하게도 아기가 없는 집에 업둥이를 많이 갖다 놓았다고 한다. 그러면 내내 아기 없던 엄마가 갑자기 아기를 임신하는 예가 많았다고.

그 외에도 아들이 없는 큰 집에 작은집 아들이 양자로 가기도 하고. 가정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전통과 도리, 가난과 불운과 싸우면서 만들고 극복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20여 년 전에 친구 어머니도 미국 딸 네 집에 갈 때마다 봉사도 할 겸 홀트에서 해외 입양을 보내는 고아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시곤 했다.

홀트에서 개발한 '에스코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써 해외 입양 고아들을 해외의 양부모에게 인계해 주는 것이었다.

 봉사도 하고 항공료도 절약하시며 본을 보이셨던 분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신다.

'돈도 많으신데 왜 고생을 사서 하신담'했던.

 미국까지 논스톱 13시간 비행에 지쳐서 중간에 뛰어내리고 싶을 지경이셨을 텐데 어린애들을 데리고 사고 나지 않게 미국 양부모에게 인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요즘처럼 반려견을 한국에서 외국으로 데려다 주는 시스템이 활발하게 생기기도 훨씬 전이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입양되어서 자라서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된 한 입양아의 말을 들어보면 기독교가 왕성하던 미국에서 1950년 대 부터 기독교 가정에서는 전쟁고아나 가난한 나라에 있는 고아들을 입양하는 것이 큰 덕목이기도 하고 한때 유행이었다고.


전쟁이 나면 제일 피해 보는 약자는 노인과 어린이들이다.

힘없고 의존해야 하는 약한 존재들이기에. 억척스럽고 강인한 모성의 소유자인 한국 어머니 세대들의 자식을 향한 희생으로 자녀들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지켜냈지만 부모를 잃은 어린애들은 키워줄 친척들도 가난했기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아원을 전전하다 미 8군에서 하우스 보이를 하다가 미군 양아버지를 만나서 미국으로 가서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입양은 해놓고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 둘 다 마약을 하거나 사이코 패스들일 경우 아이의 인생은 엇나가 버리고 만다. 그러나 미국 태생인 서양인이라  할지라도 계부, 계모와 살면서 18세가 되면 독립해야 한다고 등을 밀어서 집에서 내보내면  자립을 못 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정말 정말 독특한 독립정신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아이들 외에는 마약에 빠지기가 쉬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알바를 해도 여러 명이 집 하나를 빌려서 룸 메이트들로 구성되어 그럭저럭 먹고는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어서 살기에는 경제사정이 취약하다. 그래서 동거하다가 아이를 낳고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마치 지푸라기로 만든 것처럼 허술하니 쉽게 이혼하고 싱글맘이 된다. 그러다가 다른 파트너를 만나서 살다 보면 아들은 겉돌고 사춘기 딸들은 마치 허가 낸 범죄자같은 계부에게 육체적으로 abuse를 당하다가 가출을 해버리면  인생이 꼬이는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 누구도 그녀를 향해 '지팔지꼴'이라고 비난할 수 없는 밀실같은 가정이란 지옥때문에.


국내외 고아들을 입양하여 자신의 친 자식들과 구별 없이 정성을 다하여 키워낸 훌륭한 서양 양부모들의 미담도 많다.

전쟁 후에  강퍅한 사회환경에서 훈육과 징계로 자녀들을 채찍질해서 사회인으로 성공시키려는 극성맞고 악착스러운 한국 부모세대와는 다른 서양 부모의 조건 없는 칭찬과 격려로 성장한 입양자녀들은 그야말로 생부 생모와의 결별과는 별개로 진정한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부지런하고 열정이 많으며 순종적인 한국인 특유의 천성에 조건이 안 붙은 격려를 받으니

꽃이 만개하듯 실력을 발휘한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


고아의 최대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썼던  한국이 이젠 세계에서 기술과 여러 면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해외로 입양됐던 아기들이 고국을 돌아보러 방문도 하고 한국 태생들과 결혼도 하는 등, 이제는 활발하게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이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리 밑에 거지들이 가마니로 문을 만들어 치고 살았다.

저녁 먹을 때가 되면 거지들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동냥을 하였다.

맥스웰 하우스 커피 깡통에 철사를 꿰어서 만든 동냥통에는 보리밥에다 생선 살은 거의 바른 가시만 남은 생선 대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친할머니는 어떤 때 그들을  

마루에 불러들여서  동그란 앉은뱅이 밥상에 쌀밥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실 무장아찌에다 국 한 그릇씩 차려서 먹여 보내곤 했다. 친할머니=엄마의 시어머니는 이렇게 인정이 많으면서도 나를 임신했던 엄마가 입덧이 끝나고 너무 배가 고파서 밤에 부엌에서 밥을 좀 먹은 다음날에

친할머니가 '밤에 인쥐가 다녀갔구나'라고 면전에서 무안을 주신 호랑이 시어머니였다고.

못 먹고 굶주리던 시절을 거쳐 오면서 웃다가 우는 생활상은 이제 먼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젠 노인의 지혜도 필요치 않고 어린이들은 구구단 대신 코딩을 하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요즘 고장 나기 시작하는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친구가 망막 분리 때문에 눈 수술을 하였다. 수술 후의 완치율은 25%라고 해서 무지하게 실망을 했을 뿐만 아니라 깨어진 유리창을 통해 보는 것 같은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만 나온다고.

 또한 눈 안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기름 주머니를 넣어서 힌달동안은 밤에 잠을 앉아서 자야 된다고 의사가 지시했다고. 그러니 입맛이 없어서 아들에게 죽을 좀 사 오라고 했더니 서양 마켓에서 깡통에 들은 캔 수프를 종류별로 26개 사 왔다고 기가 막히코가 막히더라고.

한국 입맛에는 절대로 맞지 않아서 먹지도 못해서 다 도네이션 했다고 한다.

세대가 다를 뿐 만 아니라 이민자 부모와 자녀 간의 입맛도 안 맞고 대화를 하다 보니까 엄마 입맛이 어떤지도 모르니

서로가 너무 다르고 빠르게 변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동네 골목에 밥 짓는 구수한 냄새가 퍼지는 저녁 무렵까지  흙바닥에서  넷플릭스 드라마의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대부분의 놀이를 신나게 하면서 놀았다. 더운 여름밤에는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맑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았다. 학구열에 불타는 내가 아닌 엄마의 극성에 별을 보면서카시오페아 별자리를 외우며 찾던 어리숙하고 맹한 초등학생이었던 나.


세월은 쏘아놓은 화살같이 거침없이 날아가 서서히 달라지는 것 같던 세상이 어느 순간 많은 것이 확 바뀌어 버리고 많았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라서 운이 좋다고 했더니 지난 2년간 코로나라는 세균 전쟁에서 맥을 못 추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여행은 그림의 떡이 된 요즈음 밴쿠버에서 가까운 시애틀도 못 간다.

이 세상에 소풍 왔다 간다던 어떤 시인처럼 여행 온 것이 아니라 모태를 통해서 이 땅에  입양되었던 것은 아닐까?누가 양부모가 될지도 모르고 비행기에 태워진 어린 아기처럼 이 세상이 얼마나 기막히게 선과 악이 뒤섞인 혼돈의 도가니라는 것을 모른채 태어난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나저나 노인이 되어가는 나같은 입양인이 아플 때 자녀들이 깡통 수프를 가져올지 어떨지 

요번 설에 나의 뱃속에 나온 입양아들에게 물어봐야겠다.

아니면 구차하게 엄마의 음식 취향을 구구절절이 이야기해 줘야만 아플때 굶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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