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반데룽, 조급할수록 쉬어가기

순간 한 조각(21/30)

by Shysbook

책을 읽다가 '링반데룽' 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한자로 풀어쓰면 환상방황이라는 등산 용어다.

이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알고보면 같은 곳 주변을 맴도는 상태.

링반데룽의 조건으로는 주변 환경이 악천후거나 등산객이 피곤해져 사고력이 둔해져 있거나 아니면 지형 자체가 기복이 적은 곳에 주로 발생한다고 한다. 링반데룽에서 벗어나려면 간단하다. 악천후가 걷힐 때 까지 주변에서 쉬어야한다는 것. 이미 같은 자리를 오랫동안 배회했던 터라 생각도 둔해지고 체력도 많이 떨어져 있다. 그럴 수록 회복할 시간을 충분히 주면서 내가 가는 방향이 이게 맞는지 스스로 생각해야한다.


삶 또한 링반데룽에 걸리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내 주변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경쟁자들은 태릉인마냥 정상을 향해 크로스컨트리를 하는 기세로 치고 가는데 나는 이대로 쉬어도 될까라는 조바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달려가기엔 너무 지쳐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는 '쉬는 쪽' 이 차라리 리 결과가 나았다. 쉼 없이 달리다가 퍼지면 아예 소생 불능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치 않은 상황을 마주할 때가 간혹 있다. 올해 초 갑작스레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와 잇다른 경기침체와 취업난과 퇴사에 나도 모르는 사이 조바심이 가슴 속에 깊숙이 자리잡곤 했다. 이대로 쉬기보다 꾸준히 무언가라도 해야한다며 별의 별 짓을 다했던 거 같다. 책을 만들고, 글쓰기를 계속하고, 짧게나마 회사를 들어갔다 나왔고, 면접을 보러 다니고, 구글애널리틱스,포토샵 일러스트 등의 클래스를 들었다. 하지만 뚜렷한 목적과 데드라인도 없고 무엇보다 조바심에 이것저것 하다보니 딱히 무언가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뭔가를 자꾸만 애를 쓰면서 달려왔는데 방향이 잘못된걸까..

설상가상으로 마음 속 깊이 외로움과 우울함이 찾아오니 이러다 나를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아, 쉬는 게 뭘까?'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나는 아니 쉬어도 조바심에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시달린 이후로

뭘 하더라도 집중하기 힘들었다.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즐거워하는 마음보다 '숙제'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쉼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좋아하던 것마저 싫증을 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건

내 마음에 S.O.S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때 과감히 나는 '일시 멈춤' 버튼을 눌렀다.

내 쉼을 방해할만한 요소들을 조금씩 차단하기 시작했다.

중독에 가까울만큼 산만하게 하는 인스타그램을 한 달 정도 휴점했고

밤 8시 이후에는 스마트폰을 아예 꺼두기로 했다. 티비도 가급적이면 보지 않았다. 하루 총량 2시간 미만으로 정할 정도.


일단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명상을 시작했다.

코로 호흡하고 부풀어 오르는 폐와 배 사이로 내면의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곤 했다.

'쉬면서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라고.

제대로 쉬지 않고 무언가를 더 하려다 탈이 나면, 아무 것도 안한 것만도 못한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쉬지 않고 무직정 이력서를 쓰고 취업 포털사이트에 지원한 회사는 되려 기회를 멀어지게 하고

방향성이 잡히지 않은 포트폴리오는 의미 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쉴수록 바닥난 의욕이 회복될 때 비로소 무언가를 할 힘이 생겼다.


머리에 생각을 비우려 러닝이나 맨몸 운동을 시작하니 잡념이 사라지고

힘든 순간이 찾아와도 오히려 더 잘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힘든 순간이 영원히 잊히지 않을지라도 불안함이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쉬면서 나는 영상 편집을 하기 시작했고, 무언가를 하는 것에 두려움이 조금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쉬면서 링반데룽이 그치길 바랐다. 나이가 들어가고, 커리어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음은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쉬면서 체력을 회복한 다음 생각하고 계획을 천천히 돌아보면 제자리 걸음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뭘 더 하기보다, 일단 하나라도 집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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