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누적, 중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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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많은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으로 시작되는 편지. 다들 한 번쯤은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주를 피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며 내 이웃이 저주를 피해 가길 간구했던 그 마음이 서점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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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저주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하기엔 너무 가혹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오랜 시간 방치된 채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을 볼 때마다 사람들에게 돌지 않는 책의 말로는 쓸쓸하기만 하다. 이 책은 어쩌다 이 지경(?)에 놓이게 되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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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서점 특성상 서재에 꽂힌 책들은 누군가의 손을 거친 책들이 대부분이다. 가끔 서재에 종이 사이로 미처 처리하지 못한 부속품(?)들이 어쩌다 발견된다. (매입 과정에서 버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주로 다른 서점에서 샀던 책갈피, 책을 처음 샀을 때 받은 영수증, 가끔은 비행기 티켓이나 성경 구절이 적힌 종이가 꽂혀있다.
부속품을 보며 이 책이 우리 서점까지 오게 되기까지의 사연이 궁금하면서도 한 편으론 전 주인의 추억까지 같이 묻어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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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일을 하기 3년 전, 어느 중고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샀던 적이 있다. 책장을 넘겨보다가 김포공항 서점 영수증이 꽂혀있었다. 잉크가 서서히 빛을 바란 영수증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구매 일자가 2013년으로 적혀있었다. 김포에서 부산까지 먼 길을 돌고 돌아 내 손에 들리기까지 3년 동안의 여정을 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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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재미난(?) 상상의 나래에 잠겨봤다. 책을 처음 산 손님은 김포 공항 내에 있는 한 칸 방 크기의 작은 서점에서 기내에서 시간을 보낼 만한 책이 뭐가 있을지 뒤적이다 이 책을 발견했을 것이다. 2013년 여름 즈음에 나온 이 책은 한 때는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책이었으니까.
여행을 마칠 무렵까지 그 책을 다 읽고는 집에 돌아와선 서재에 꽂아둔다. 한몇 년 동안은 여행기에서 읽었던 책이라 애틋한 마음을 품어보지만, 3년의 시간이 금세 흘러버렸다. 새로 산 책들이 너무 많아 이제는 서재 정리를 감행해야 할 때가 왔다.
여행지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함께 했던 책과의 추억들이 쌓인 옛날 책들을 한 권 두 권 모아다 서점에 되파니 시중에 쥐어진 돈은 1만 원 남짓이다. 오랜 추억을 돈으로 환산해보니 너무 가볍게 느껴질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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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포공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3년 만에 긴 여정을 거쳐 많은 사람들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나에게로 옮겨진 이 책은 주변 책들로부터 존재가 잊히기 직전에 구출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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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었던 책을 다른 누군가가 사서 읽으며 세상을 여행하는 책과 그 부속품을 볼 때마다 책은 한 편의 자유로운 영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서재를 둘러보다가 성서에 꽂힌 말씀 종이가 꽂힌 책이 들려있었다. 우리 서점과 제법 먼 지역에서 온 책이 우리 서점과 인연이 닿아서 그런지 반갑기도 하면서 다음에는 어떤 주인을 만나서 어디로 떠날지 상상의 나래를 또 펼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