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하는 자아로 자랄 때 비로소 인생의 '진'짜 '구'원자가 된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도라에몽같은 친구 하나를 두면 이 세상을 사는데 편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뱃주머니 안에서 나온 암기빵 하나로 방대한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내용들만 찍어서 먹으면 시험 기간에 굳이 밤샐 필요도 없을 것이고 성적도 수월하게 받았을 텐데 말이다.
<도라에몽>을 보면서 힘들수록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편한 방법을 찾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론 비약적인 해석일지 몰라도, 만화에 나오는 진구는 실제 현대인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서 온 도라에몽으로부터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해쳐나가야할지 의존하는 것 자체가 현재가 그만큼 불안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진구의 0점 시험지.
하지만 만화를 보면서 미래의 것으로부터 의존한다고해서 삶이 보다 나아져 해피엔딩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항상 에피소드 말미에서는 도구를 과하게 남용하다 부작용을 겪거나 곤란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곤 했으니까.
그런데 스스로 해결할 능력없이 도라에몽이 없다면 혼자서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야할까라는 생각에 아찔하기만하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지내는 인생은 불안을 완전히 해쳐나갈 수는 없다. 실패를 하고 넘어지고 좌절할 지라도 결국 인생 전반의 책임은 본인 것인데 말이다.
만일, 실패를 모르고 그저 순간의 처세에 모면하느라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면 인생 전반이 나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도구에 의해 살아온 온전치 못한 자아를 지닌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상황을 극복하는 것 자체가 희망의 증거다. 0점을 받던 아이가 어느 날 학업에 충실해서 다음 시험에서 20점을 받았어도 희망의 실마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가라. 그것을 피한다든가 욕하지는 마라. 그것은 당신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다.” 라는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덧.
<냉정과 열정사이>를 썼던 츠지 히토나리가 도라에몽은 프랑스에서 방송하지 않는다고 오보(?)를 내버린 바람에 프랑스는 도라에몽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라고 와전되어버린 경우가 있다. 실제론 방영기간이 다른 에니메이션에 비해 짧아서지 방송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덧붙여서 프랑스에서 방영하지 않는 이유가 교육위원회가 ‘진구가 도라에몽의 도구에 의존하는 모습에서 아이가 성장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는데 비록 가짜뉴스(?)지만 은근 일리가 있는 말이긴하다. 만일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이 만화를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만 같다. 교육적으로 건전하지만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