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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와 자유 사이 런던을 거닐다

남겨두고 떠난 마음이 도착한 곳엔 우산이 없었다

by 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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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일 것이다





비가 흩어지는 런던의 거리를 걸었다. 나는 젖은 돌바다 위에 조용히 발끝을 내려놓으며, 지금껏 붙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놓아주는 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만 했던 체면, 누군가가 만들어준 기준, 더는 나에게 맞지 않는 욕망, 오래된 관계들의 그림자. 그 모든 것들을 마음속에서 하나씩 걷어내고 있었다.



마음은 이상할 만큼 허전하지 않았다. 비워내기 시작하면서 느껴지는 모든 것에 해답이나 이유 따위를 달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몇 년 만에 깊은숨을 들이마신 느낌이었다.



런던, 여러 겹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는 도시. 런던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도시는 늘 두 겹으로 겹쳐 있어 보였다. 백 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돌처럼 남아 있는 거리를 걸었다. 마치 숨을 쉬는 벽처럼 오래된 벽돌이 기념비처럼 세워져 있는 도시. 코벤트 가든의 회색 건물들과 소호의 좁은 골목. 템스강에 걸린 다리들은 누군가의 발자국을 오래도록 붙잡아두는 역할을 하듯, 나는 런던의 이곳저곳을 매일 무작정 걸었다.



런던은 생각했던 것만큼 화려하지 않았지만, 깊은 색이 느껴졌다. 색을 많이 쓰지 않지만, 색이 풍부해 보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며 걷는 길에 비가 내렸다. 조용한데, 감정을 많이 품은 도시. 비는 조금 더 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런던의 비는 서울과 다르게 정직했다. 마음이 무거운 날엔 더 무겁게, 가벼운 날엔 부드럽게 내렸다.

내 어깨를 적시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나를 위로하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옷을 만드는 일을 멈추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늘 마음이 시킨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 따위는 뒤로 둔 채 서울을 떠났다. 더 이상 옷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비가 내리던 날. 테이트 모던을 향해 걸었다. 그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미술관이라고 했다. 영국에 거주했던 지인이 꼭 가보라고 한 곳이었다. 그는 디자이너고, 지금 일본 도쿄에 살고 있다. 나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작은 사무실에 갇혀 있는 나 자신이 싫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낮과 밤이 사라진 사이 잠시 눈을 감는 몇 시간의 잠이 싫어져서였다. 미친 듯이 해도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미술관을 향하는 길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커다란 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 위에서, 오래된 벽돌 건물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 여행은, 이렇게 조용한 풍경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누구와도 함께 오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고 단순했다. 여전히 나는 혼자만 원했다. 나를 끝까지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살아가며 포기한 것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저릿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그 선택들 덕분에 나는 이곳까지 왔다. 손 안에서 빠져나간 인연도, 결국 나를 머물지 못하게 하던 공간도, 지나친 기대와 지나친 죄책감도, 다시 돌아보면 나는 그것들 덕분에 비로소 본래의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쓸쓸하고 아름다운 런던의 빗에서 나는 처음으로, 자신을 잃지 않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기대도 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직 내 발이 가리키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앞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살아가며 선택한 것 중 하나일 뿐이었다. 포기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 포기가 오히려 내겐 유통기한이 없는 자유를 줄지 알았지만, 그 자유의 유통기한은 매우 짧은 것이었다. 지독했던 서울을 잠시 떠나왔지만, 나는 스스로 포기한 것에 잠시 얻은 자유를 즐기고 있었던 것뿐이라는 사실은 금세 발각되고 있었다. 걷는 길에 비는 그쳤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테이트 모던에 도착하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이 보이는 풍경이라고. 테이트 모던에 도착하면, 어쩌면 어떤 작품도 나를 구원해 주지 않을지도. 이 길을 걸어오는 동안 이미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느꼈다. 구원은 없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사고가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 색도 피부색도 다른 사람들 사이를 스쳐가며 미술관을 둘러보고 맨 꼭대기 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눈앞으로 템스강이 보였다. 그리고 지인이 말한 대로 어느새 비가 그친 하늘 사이 세트 폴 대성당이 보였다. 그리고 시야 한가득 이 도시가 그려지고 있었다.



맥주 한잔을 놓고 풍경을 바라봤다. 비에 젖은 부츠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포기한 것들 위에 새로운 나를 세우려는 사람처럼 누구의 기대도 아닌, 오랜만에 나 스스로 선택한 속도로 풍경 속에 스며들어 버렸다. 오래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나는 자유를 말할 것이다. 오래되지 않는 지속성을 갖고 있는 다시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쉬어야만 하는 것처럼, 여행길에 느꼈던 자유의 숨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돌아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런던의 알 수 없는 하늘의 기운처럼,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그 소나기를 막아줄 우산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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