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의 또 다른 모습
하인리히.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지 나는 모릅니다. 이곳의 밤은 너무 길고, 검은 그림자는 숨이 붙어 있는 모든 것을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가 지금 이 글뿐이라서요. 나는 요즘 당신의 손등을 자꾸 떠올립니다. 전쟁의 흙먼지를 묻힌, 그러나 누구보다 따뜻했던 그 손을 말이죠. 그 손이 내 어깨에 닿던 순간만큼은 수용소의 냉기와 고통이 모두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잠시라도 바라봐 주던 눈빛을, 나는 아직 놓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내게 허락된 단 하나의 온기였어요.
하인리히.
나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틸 자신이 없습니다. 벽에 새겨진 번호들이 밤마다 나를 삼킬 것 같아요. 아무 말 없이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내 발목까지 자꾸만 차오릅니다. 숨을 들이켜면 쇠와 피의 냄새가 폐 속 깊이에 내려앉고, 눈을 감으면 여기가 아니라 다른 세계를 꿈꾸는 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나는 도망치고 싶습니다. 아니, 탈출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마음을 끝까지 숨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목소리가 내 안에 남아 있어요. 당신이 나를 향한 사랑의 속삭임이 들리는 거 같습니다. 당신이 지켜보는 방향으로 내가 걸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곳을 벗어나는 길에 어둠이 깊게 드리워져도 나는 당신의 이름을 마음속에서 쥐고 갈 것입니다. 그 이름 하나가 나를 죽음의 경계에서 떼어낸 유일한 빛이었으니까요.
하인리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말은 이 수용소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가장 위험한 고백이지만 동시에 내가 아직 인간이라는 마지막 증거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이 철문을 넘어 당신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와 겹칠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나는 그 희망을 품은 채 채끝까지 걷겠습니다. 만약 내가 실패하더라도 이 마음은 당신에게 닿았기를.
그레타 드림.
당신은 아시나요? 인간이 부서진 자아를, 다시 그 조각을 모으는 과정이 얼마나 걸릴지를 말이죠. 닫힌 공간에 있어도 불안해지고, 조금만 통제받아도 과거의 그림자가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조각을 모으는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요. 인간이 살아남으려고 발악하는 순간, 그 조각들은 모으지 않아도 된다면 당신은 믿겠습니까?
인간의 복합적이고 잔혹한 심리기제는 이 편지와 같은 것이지요. 수용소, 폭력, 감시 체계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이용해 생존을 도모하는지, 깊고 날카롭게 설명해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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