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빛 아래 르네의 독백이 짙은 새벽

르네를 바라보는 투명인간

by 구시안

달빛이 들어왔어. 언제나 그랬듯 아주 조용히, 말 한마디 없이. 가느다란 창살 사이로 스며든 그 얇은 빛이 내 얼굴을 스쳤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어. 그저 달빛을 바라보며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마음은 왜 이렇게 무거운 걸까. 총성도, 비명도, 모든 소리가 사라진 밤인데도 내 안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어.



내가 왜 여기 있는지조차 흐려지고, 그때의 선택은 왜 나를 이렇게 흔들었을까. 살고 싶었고, 돕고 싶었고, 믿고 싶었는데 결국 남겨진 건 나 혼자였어. 날 가둔 건 철장이 아니었어. 내가 나를 가두고 있었어. 내 안의 깊은 어둠이 철문보다 먼저 나를 잠갔어. 달빛은 차갑고, 솔직했고, 그래서 더 미웠어.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너무 담담히 비추고 있었으니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잔인하게 느껴졌어.



살아남는다는 건 누군가의 죽음을 건너왔다는 뜻이니까. 내가 지나온 얼굴들, 이름들, 목소리들은 잊으려 할수록 달빛 아래서 되살아났어. 그래서 달빛이 싫었어. 창살 틈에서 떨어지는 그 빛이 마치 그들의 눈처럼 나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너는 우리를 기억하니? 너는 아직도 살아 있니? 살아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가끔은 잘 모르겠었어.



몸은 숨을 쉬지만 마음은 어디선가 멈춰 있는 듯했어. 끝나지 않은 전쟁의 잔해 속을 혼자 걷고 있는 사람처럼 자꾸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어. 오늘도 달빛은 잔인하게 맑았어. 세상의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데, 내 마음만큼은 끝없이 복잡하고 어두웠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어. 이곳에 갇혀서야 조금씩 보였어.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았고, 누구를 지킬 힘도 없었던, 그저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약한 인간이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괜찮겠지. 약한 인간도 인간이니까. 부서지고 다시 붙고, 또 갈라졌다가 이어지며 겨우 살아가는 존재니까. 오늘 밤 나는 말하고 있어. 말하지 않으면 가슴속 어둠이 더 자랄 것 같아서. 말하면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달빛은 언제나 멀리서 왔어. 전쟁도, 상처도, 죄도 모르는 듯 내려앉았어. 그래서 미웠고, 그래서 또 바라보았어.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보이지 않으면 나는 다시 무너질 것 같아서. 오늘 나는 너를 보며 버티고 있었어. 내일도 버틸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고 있었어. 그런데 왜 살아남은 자는 늘 죄인처럼 떨고 있어야 할까. 달빛아, 너는 대답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또 너에게 묻고 있었어.

이 모든 밤과 숨과 떨림 속에서 나는 분명히....있었어.




저는 문틈의 냉기를 스쳐지나 안쪽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저의 발자국을 듣지 못하지요. 짙은 새벽녘에 작은 창에 앉아 달을 바라보는 그녀조차 저의 발자국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숨을 들이켜도, 세상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저 저기 창살 아래 주저앉아 있는 르네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손목에 잔뜩 패인 붉은 흉터를 매만지며 그녀의 눈은 달빛을 응시한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넋이 나간 것처럼 앉아 있는 그녀는 이미 영혼이 사라져 가는 듯 했습니다. 그녀의 속삭임은 쇠창살을 긁는 먼지처럼 가볍고 달빛에 닿을수록 서러움이 겹겹이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 곁까지 다가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녀의 눈은 밤새 퍼붓던 포격의 흙먼지를 그대로 머금은 듯 흐렸습니다. 하지만 달빛이 조심스레 비추는 푸른 눈동자 속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아주 작은 생의 불씨가 있었지요. 르네는 창살을 붙잡고 몸을 기울이며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만 망가져 가고 있는 것을 달빛에게 말하고 있었지요. 그녀가 내뱉는 한숨은 벽에 부딪혀 조용하고 천천히 작은 감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배신은 간사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였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며 저는 르네를 지키려고 많은 힘을 쏟아 내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다시 부헨발트로 붙잡혀 오며 겪어야 했던 총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이미 그녀는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포기가 그녀의 영혼을 갈가먹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존재들과의 전쟁은 매우 피곤한 것이었답니다. 그녀를 노리는 존재는 저 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싶었지만 저의 손은 허공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라진 몸, 사라진 온기, 사라진 세계 속에서 저는 그저 그녀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투명한 목격자일 뿐입니다.



그녀는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털어놓듯, 마치 누군가 곁에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을 달빛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르네에게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너의 이 어둠 속에서 살아 있다고 네가 느끼는 슬픔 공포 죄책감 나는 모두 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달빛은 창살 사이로 그녀의 뺨을 흐릿하게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 빛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잠깐이나마 인간의 얼굴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르네의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투명한 세계에서 저만이 지켜본 이 전쟁 속 한 인간의 너무나 조용한 절규를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에게 모든 걸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keyword
이전 09화그레타가 하인리히에게 보내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