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의 빛이 방 안을 희미하게 물들였다. 모니터의 푸른빛은 바람보다 느리고, 숨보다 섬세하게 퍼져 벽에 부딪히고, 다시 내 얼굴 위로 번졌다. 손끝은 키보드 위를 천천히 헤맸다. 한 글자씩 눌러질 때마다, 그 소리가 공기 속에 남았다. 그건 마치 아주 오래된 기억이 다시 돌아오는 소리 같았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처럼.
열어 뒀던 창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종이 냄새 대신 금속의 냄새, 전자의 미세한 열기가 방안을 감쌌다. 잠시 그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이 차가웠다. 왜 이렇게 쓰게 되는 걸까. 왜 말로 남길 수 없는 것을 글로 번역하려 하는가. 사랑도, 후회도, 추억도, 결국은 언어의 틀 속에서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게 되는데, 나는 그 틀 속에서 사라진 것들을 붙잡으려 애썼다.
노트북 화면에는 흰 문장이 떠 있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나는 계속 쓰고 있었다. 그 문장을 쓴 뒤, 한참 동안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커서가 깜빡였다. 그 깜빡임이 내 심장의 박동처럼 느껴졌다.
멈추지 않으려는 생의 마지막 파동 같았다.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창밖의 가로등은 불빛이 점점 더 옅어지고, 밤은 조금씩 더 깊어졌다. 나는 한때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길을 떠올렸다. 그 길의 냄새. 그 사람의 목소리. 그때의 공기.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간. 소리 없이. 그러나 완벽하게 이 밤이 고요로 물들고 있었다. 노트북의 팬 소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그 일정한 울림이 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현실의 소리이자. 나를 붙잡는 유일한 리듬이었다. 모든 기억은 결국 사라지는 법을 배우기 위한 과정이다.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키보드를 따라 번졌다. 한 자 한 자, 그 떨림이 기록되었다. 밤은 깊어지고, 화면의 빛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때의 나는 마치 안갯속에서 타자를 치는 사람 같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 쓰는 사람. 단어가 나를 구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썼다.
커서가 멈췄다. 화면에는 불완전한 문장이 남았다. 나는 그 문장을 고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어딘가에 멈춘 채 남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노트북을 덮자, 방 안의 공기가 조금 식었다. 손끝에 남은 열기가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불안은 여전히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의 무게는 늘 무거운 중력을 갖고 있다. 둘로 나뉜 듯한 두꺼운 벽은 여전했다. 돈을 벌며 현실을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마음은 어떠한 불안도 없이, 여유로운 생각들로 물들어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이 둘 사이를 시원하게 뚫을 문이 하나기 있었으면 좋겠다는 오랫동안 묵어 있는 희망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 둘 사이를 반백 살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낮과 밤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닫고 하고 있다는것에 씁쓸한 그림자가 여전히 방안 벽에 선명하게 드리워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풀지 못한 숙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글자와 기억이. 바람과 안개가 서로를 스치며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