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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심장

침묵의 방

by 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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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살아간다. 기억의 벽을 두드리며, 폐허 속 심장을 붙잡고. 침묵의 방에서 자신을 듣는다. 결국 삶이란, 자신이 만든 어둠을 통과해 다시 뛰는 심장을 만나는 여정이다. 나는 그 여정을, 검은 숲이라 부른다.






아침은 예상보다 느리게 찾아왔다. 그는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시계는 멈춰 있었다. 창문 없는 방, 먼지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안개처럼 가득 차 있는 연기 사이로 보이는 것은 사방이 막힌 벽, 그을린 낡은 의자 하나, 그리고 자신뿐이었다.



벽에는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오래전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 그 흔적 위로 손가락을 대자, 차가운 감촉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문득, 그것이 자신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부서진 유리처럼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고, 그 조각마다 피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멈춘 채, 세상의 심장이 조용히 멈추는 듯했다. “오늘 하루,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몇 주 전, 그는 자신이 살던 집이 불에 탄 것을 목격했다. 아니, 집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켜온 삶 전체가 무너졌다. 집이 불타고, 불길이 천장을 핥으며 기억을 삼켜갔다. 어제의 잔상처럼 그는 불길 속을 걷고 있었다. 불타는 냄새가 아직도 그의 피부에 남아 있었다. 불길 속에서 꺼낸 것은 몸뿐이었고, 마음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자신의 심장이 왜 아직 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전화벨이 울렸다. 익숙한 번호였다. 그는 손을 떨며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시죠?”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굳어 있었다.그러나 전화기 반대편 쪽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 침묵은, 마치 자신이 내뱉은 숨소리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 같았다.



그 침묵은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방구석으로 걸어갔다. 벽 틈새로 스며드는 빛 한 줄기가 먼지를 타고 내려왔다. 그 빛 속에서 그는 자기 얼굴을 보았다.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 누군가의 얼굴 같기도 하고,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같기도 했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이 전화는 현실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그의 과거가, 그를 불러내고 있었다. 심장은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심장은 자신이 버린 기억과 감정을 붙잡고 있었고, 그 잔해 위에서 그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마음의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그러나 바람이 가져온 공기는 너무 차갑고, 태양이 던진 빛은 너무 강렬했다. 빛과 어둠 사이, 그는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그날 밤,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고, 그 심장이 뛰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살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살아 있음이 결국 그의 죄이자 벌이라는 사실. 바깥세상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의 폐허 속 심장은 폭발 직전의 화약처럼,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이 오자, 방 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벽 틈새에서 새어 나온 바람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그 바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했던 말 같았다. "나를 잊지 마." 그 말이 귓속을 울릴 때마다 심장이 비틀거렸다. 그는 가슴을 쥐었다. 고통은 없었지만, 묘하게 뜨거운 느낌이 있었다. 마치 불길 속에서 꺼내 온 심장이 다시 타오르는 것처럼. 그는 그 열기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벽 한쪽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 틈을 더듬었다. 그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은 너무 약해서, 오히려 어둠보다 더 잔인했다.



그는 그 빛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 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는 그 자신이 있었다. 기억 속의 자신. 잃어버린 이름을 부르는 소년. 울고 있는 남자. 그 모든 과거가 벽 너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벽을 주먹으로 쳤다. 벽은 부서지지 않았다. 부서진 것은 오히려 그의 마음이었다. 그 안에서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흘러나왔다. 미움. 슬픔. 후회. 그리고 사랑. 그 감정들이 뒤섞여 한 덩어리의 피처럼 심장을 적셨다. 그 순간, 방 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이 갈라지고, 바닥이 무너졌다. 그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동안에도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그 심장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또 다른 방에 있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듯 새로웠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말을 잃은 상태였다. 입을 열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완전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알아차렸다. 이곳이 마지막 공간임을. 무겁고 차가웠던 기억의 감옥을 지나 참기 힘든 고통이 물들어 있는 폐허의 심장을 통과해, 이제, 드디어 침묵의 방에 도달했다는 것을.



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을 잊지 않았다. 다만 말이 필요 없을 뿐이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고, 그 리듬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증거이자 다시 시작되는 삶의 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오랜 시간의 사투 끝에 찾아온 가장 조용한 평화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울창한 검은 숲이 열렸다. 그는 숲속에서 비추는 빛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우듬지 사이로 비추는 달빛아래 사람들의 심장이 나뭇가지마다 걸려 힘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폐허로 물들어있는 수많은 심장들이 검은 숲을 이룬 커다란 나뭇가지마다 걸려 두근거리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마침내 스스로를 되찾아 가는 인간의 심장처럼. 그 심장은 조금씩 희미하고 여리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반딧불의 작은 빛처럼 조금씩 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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