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의 경계
꿈 없는 암전을 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슬픔의 위계를 나누지 않는 색.
그 색들이 치료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희망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초심자일수록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아가며 배웠다.
책 속에 즐비한 좋은 말들을 따라 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완벽을 가하느라,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 그리고 두려움은 늘 일상 속에 존재했다.
비가 오면 세상은 느려졌다.
즐비하게 늘어선 우산행렬이 시작되는
퇴근시간의 지하철 플랫폼은
이미 사람들의 비가 내리고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처럼 느껴졌다.
옆 사람들의 우산이 닿기 싫은 가시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젖은 신발이 늪에 빠져 허우적 되는
여린 사슴의 발처럼 촘촘한 걸음질들이
아우슈비츠를 향하고 있는 열차안의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집단 학살장으로 향하는
하루가 매일 반복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반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고,
좁고, 얼마나 순간적인지를
숨 막히는 지하철 안에서 느끼고 있었다.
이 늪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사십 분가량 늪 속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남기 위해 호흡하는 실랑이가 끝나고
다시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렸다.
우산이 펴지며 사람들과의 우산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퍼졌다.
책상 위에 가볍게 턱을 괴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르게 보였다.
도로의 자동차 불빛이 지평선 위에 별처럼
빗물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색을 측정하는 도구는 없다.
색에도 온도가 있다면
분명 여러 가지의 색으로 바뀌는 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늘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사람들의 온도에 맞춰
그렇게 달리하는 색깔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밤을 비추는
네온사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핑계를 줄였다.
누구도 흉내 내고 싶지 않았다.
일상의 소란은 잠깐의 위장일 뿐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소란으로 바뀌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북향 방향에 살고 있다.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을 견디며
북향 방향으로 난 창문은 거의 열리지 않았다.
어둠의 단어들이 녹지 않게 스탠드 조명 아래 앉아 글을 섰다.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삶에 대해서.
그렇게 지쳐가는 몸뚱어리가 이불을 둘둘 말게 될 때
원하던 것은 꿈 없는 암전만이 가득한 것이었다.
꿈 없는 암전을 원했다.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