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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시간과 무관심과 목소리가 남아 있는 거리

상실이라는 감각의 무질서 속에서 발견한 도시

by 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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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거리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여기서 시간은 앞으로 흐르지 않고, 퇴적된다. 오래된 것 위에 새것이 얹히고, 새것 위에 다시 무관심이 쌓인다. 그래서 이 도시의 벽은 언제나 말이 많다. 지워진 낙서 위에 다시 쓰인 분노, 사랑의 잔해, 정치적 저주, 이름 모를 이들의 서명. 모두가 떠난 뒤에도, 목소리만은 남아 벽을 점령한다.



이곳에서 걷다 보면, 삶이 관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폴리는 정돈을 거부한 도시다. 효율도, 이미지도, 미래도 이곳에서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대신 지금,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깨진 계단, 무너진 회벽, 검게 얼룩진 콘크리트. 그것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끝내 치워지지 못한 삶의 증거다.



나폴리는 상실을 숨기지 않는 도시였다.
이곳의 거리는 늘 소란스럽고,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웃고 말하며, 삶은 언제나 넘치듯 흘러간다. 그러나 그 넘침 속에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결손이 함께 섞여 있다. 나는 나폴리의 거리를 걸으며,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 도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니, 말을 건넨 것이 아니라,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나를 그 감정 속에 밀어 넣었다.



상실은 대개 조용히 온다고 믿어 왔다.

무언가를 잃고 나면 세상이 멈추고, 소음은 사라지며, 사람은 혼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폴리의 상실은 달랐다. 이곳에서 상실은 시장의 소음 속에서, 골목의 경적 소리 사이에서, 빨래가 걸린 발코니 아래에서 살아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이 계속되는 풍경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분명한 결핍을 느꼈다. 잃어버린 것은 조용히 물러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 사이에서 끝내 호명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랭보의 언어를 빌리자면, 나폴리는 감각의 무질서 속에서 유지되는 도시다.

이성은 이곳에서 길을 잃는다. 계획은 무용해지고, 설명은 과잉이 된다. 대신 시야는 열린다.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가난, 분노, 체념, 그리고 이상하게도 살아 있으려는 고집. 이 도시의 공기는 늘 약간 썩어 있지만, 그 썩음은 죽음이 아니라 발효에 가깝다.



나폴리의 무관심은 차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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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2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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