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유의 시작은 상실이었다

상실이 생각이 되기까지

by 구시안


사유는 언제나 무언가가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감정, 이미 끝났다고 믿었으나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잔여물 같은 것들. 생각은 대개 안정된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이상 감정을 감정으로만 견딜 수 없을 때, 말 대신 침묵으로 버티던 어떤 순간에서 비로소 고개를 든다.



나는 오랫동안 사유를 선택의 결과라고 믿었다.

생각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생각하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사유는 의지가 아니라 파열 이후의 반사 작용에 가깝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감정이 제자리를 잃었을 때, 사람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사유의 시작이다.



상실은 사유를 강요한다.
잃어버린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를 명확히 말할 수 없을 때. 설명을 요구받을수록 오히려 말이 흐트러지고, 감정은 더 깊이 침잠한다. 상실은 종종 사건이 아니라 상태로 남는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채, 단지 이전과 같지 않다는 감각만이 몸에 남는다. 그 감각이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은 묻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이 상태는 무엇인가를.



사유는 답을 찾는 행위라기보다, 질문의 형태를 바꾸는 일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은 대개 자신을 소모시킨다. 그러나 “이 감정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고통을 조금 다른 각도로 놓아 보게 만든다. 사유는 고통을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 고통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옮겨 놓는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피할 수 없는 감정의 중심을 정확히 건드리는 문장들. 설명하지 않고, 단정하지 않으며, 그저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태도. 랭보의 시가 그러했듯, 감각을 밀어붙여 끝내 언어의 경계에 닿는 방식. 그 문장들 속에서 사유는 사상이 아니라 상태로 존재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구시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3일째 거주중입니다.

442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8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0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4화타인의 고통에 서사를 요구하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