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라는 선택 앞에서 감당해야 할 용기에 대하여
글을 오래 써온 사람에게 더 이상 중요한 질문은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글을 써오신 존경하는 시인이자 소설을 내시고 여전히 집필 중이신 작가 한 분을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든 편안하게 찾아오라는 말씀이 기억나 연락을 드렸다. 따뜻한 차를 우려내주시며 흐르는 대화는 그분의 성품만큼이나 차분하고 고요한 것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우리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글을 대하는 태도. 글을 쓰면서 나는 늘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글을 쓰며 겪는 생각들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조심스레 연락을 드려본 것이었다. 시간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 흡수 될 만큼 좋은 말씀을 나눠주신 작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막혀있던 매듭을 다시 풀고 생각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문장을 만들 수 있는가,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가, 일정한 밀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이미 지나왔다. 손은 알고 있고, 생각은 흐를 줄 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다시 말해, 글은 얼마나 잘 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까지 자신을 열 것인가의 문제였다.
글은 장황하지 않아도 설명이 돼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글은 그렇다.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 이것이 이기적이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아주 잘 알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보이는 게 두려워하진 않는다. 화려한 문체, 과시하는 단어를 굳이 덧칠하여 사용할 필요도 없다. 여백이 있는 것이 오히려 좋은 글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글 쓰기라는 것은 늘 따라붙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무엇을 쓸까 고민되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글을 쓰려는 마음에서 글은 산으로 가게 되어 있다. 나는 그런 모든 것을 놓고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히려 다른 작가들의 세계에 들어가 읽어보는 글에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표현이나 밝은 글에서 또 다른 언어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쓸 수는 없는 글이다. 빠른 인정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글은 언제나 열림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열림은 단순한 고백이나 노출과는 다르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 용기라면,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것이 진실일까. 오히려 성숙한 글쓰기는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드러낼지에 대한 긴 고민 위에 세워진다. 그래서 ‘열기’란 무조건적인 개방이 아니라, 책임 있는 선택에 가깝다.
많은 작가가 이 지점에서 멈춘다.
더 열면 다칠 것 같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균형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글은 안전한 거리에서 쓰일 때 가장 단정해진다. 사유는 정확해지고, 문장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전함 속에서는 어떤 온기도 자라지 않는다. 독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글은 옳지만, 필요해지지는 않는다.
‘어디까지 열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자신에게 무엇을 허락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실패한 생각을 써도 되는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문장에 남겨도 되는가, 완결되지 않은 질문을 독자 앞에 놓아도 되는가. 이 허락이 없을 때 글은 늘 완성되어 있지만, 살아 있지는 않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 질문은 존재의 문제와 닿아 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을 보호하며 산다. 말은 다듬고, 생각은 정리하고, 감정은 걸러낸다. 그러나 글쓰기란 그 보호막을 일정 부분 내려놓는 행위다. 완벽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글은 자주 우리에게 묻는다. “이 정도로 드러난 자신을 당신은 견딜 수 있는가.”
문학은 언제나 이 경계에서 태어났다. 가장 오래 남은 문장들은 대개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나왔다. 작가는 자신의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균열을 내보였고, 독자는 그 균열 속에서 자기 삶의 틈을 발견했다. 그래서 좋은 글은 설명하지 않고, 공명한다. 닫힌 완성도보다, 열린 불완전함이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다.
심리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열어 보인 내면의 방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춘다. 그 방이 완전히 공개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다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에서의 ‘열림’이란, 독자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물 수 있는 여백을 남기는 일이다.
그래서 이 단계에 이른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술이 아니다.
더 날카로운 비유도, 더 세련된 구조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결심이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어디까지 나를 허용할 것인가. 안전한 생각으로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생각을 감당할 것인가. 이 선택은 늘 외롭고, 때로는 불안하다. 그러나 그 불안 속에서만 글은 다음 단계로 이동한다. ‘잘 쓴 글’에서 ‘필요한 글’로, ‘능숙한 문장’에서 ‘대체 불가능한 목소리’로. 독자는 그 차이를 즉각적으로 알아본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낀다. 이 글에는 누군가가 실제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결국 “어디까지 열 것인가”라는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매번 다시 묻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번 문장에서는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글은 늙지 않는다. 반복되더라도 닳지 않고, 조용히 깊어진다.
쓰는 능력은 어느 순간 완성된다.
그러나 여는 용기는 매번 새로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늘 초보처럼 망설이고, 동시에 숙련자처럼 선택한다. 그 긴장 위에서 글은 비로소 살아 있는 형태를 갖는다.
이제 정말로 남은 것은 하나다.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글은 더 잘 쓰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이 자신을 감당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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