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은 생각보다 조용한 곳에서 태어난다.
입술과 혀의 움직임보다 먼저, 말은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망설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망설임의 시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래서 말은 늘 즉각적이고, 가볍고, 순간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말은 언제나 오래 준비된 흔적이며, 한 사람의 내면이 밖으로 새어 나온 결과다.
말은 생각의 그림자다.
생각이 빛이라면 말은 그 빛이 벽에 남긴 형상이다. 그래서 말은 언제나 생각을 완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어떤 감정은 말이 되기 전에 이미 흩어지고, 어떤 진심은 말이 되는 순간 오히려 왜곡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로 자신을 설명하려 애쓴다. 말하지 않으면 이해받지 못할 것 같고,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말은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말로 감정을 정리하고, 말로 상처를 합리화하며, 말로 자신이 괜찮다는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동시에 말은 방어막이 되기도 한다. 진짜 감정에 닿지 않기 위해,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낸다. 침묵이 진실에 가까워질 때, 말은 오히려 도망이 된다.
말에는 관계가 깃들어 있다.
혼잣말조차도 사실은 누군가를 향한다. 과거의 타인, 상상 속의 청자,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이해자.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들려질 것을 전제로 말을 고른다. 그래서 말은 언제나 사회적이다. 말 속에는 화자의 욕망뿐 아니라, 상대의 기대, 두려움, 평가가 함께 들어 있다. 한 문장 안에 두 사람의 심리가 동시에 겹쳐진다.
철학적으로 말은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말을 통해 사물을 구분하고, 이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름이 없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고, 말할 수 없는 경험은 현실에서 밀려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가 곧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한계다. 그래서 말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세계를 그리는 지도다.
하지만 그 지도는 늘 불완전하다.
말은 삶을 설명하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말을 초과한다. 사랑을 말할수록 사랑은 빈약해지고, 고통을 설명할수록 고통은 축소된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말이 상처가 된다. 이해하려는 말이 오히려 오해를 만들고, 위로하려는 말이 상대의 고통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말은 선의만으로 안전해지지 않는다.
말의 무게는 그것이 닿는 마음에서 결정된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방향이 바뀐다. 우리는 그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말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내가 한 말이 어디까지 가 닿을지, 어떤 기억과 만나 어떤 의미로 남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불확실성 앞에서 말은 윤리의 문제가 된다.
성숙한 말은 완벽한 문장이 아니다.
오히려 여백을 남긴 말이다. 단정하지 않고, 열어두고, 상대가 자신의 의미를 채워 넣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말. 그런 말은 빠르지 않고, 크지 않으며, 종종 침묵과 맞닿아 있다. 말이 적을수록, 그 말은 더 많은 것을 담는다.
심리적으로도 사람은 말을 통해 치유되지만, 동시에 말로 다치기도 한다.
반복해서 들은 말은 내면의 목소리가 되고, 타인의 평가가 자기 인식이 된다. “괜찮다”, “별거 아니다”, “너는 원래 그렇다” 같은 말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한 사람의 자존감과 가능성을 서서히 규정한다. 그래서 말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성격이 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늦게 후회한다.
말은 이미 나갔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말 앞에서는 늘 한 번의 멈춤이 필요하다. 이 말이 지금 꼭 필요한가, 이 말이 나를 설명하는가 아니면 나를 숨기는가, 이 말이 상대를 살리는가 아니면 정리해버리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을 때, 말은 폭력이 아니라 관계가 된다.
어쩌면 말의 목적은 설득이 아니라 연결일지도 모른다.
이기기 위한 말이 아니라, 닿기 위한 말. 설명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함께 머물기 위한 말. 그럴 때 말은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 더듬거리고, 부족하고, 중간에 멈춰도 된다. 중요한 것은 정확함이 아니라 진정성이고, 유창함이 아니라 책임이다.
말은 사라지지만, 말이 남긴 감정은 오래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말보다 더 오래 남을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은 지나가지만, 그 말로 만들어진 세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세계 안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자신을 이해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말은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연약한 다리다.
쉽게 무너지고, 잘못 놓이면 깊은 틈을 만든다. 그래서 말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동시에 용기가 필요하다. 침묵과 말 사이에서 망설일 줄 아는 태도, 그것이 말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일지도 모른다.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