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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

이름이 알려지고 불려지는 것에 대하여

by 구시안



허명이라는 것은 소리부터 비어 있다.

이름은 크지만 실체는 가볍고, 울림은 요란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허명을 욕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성공, 인정, 영향력 같은 말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 중심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허명은 타인의 시선으로 유지되는 자아의 그림자에 가깝다.



세상에는 반짝 이름을 내비췄다가 금세 사라지는 이름이 있는 반면. 오래도록 불리게 되는 이름이 존재한다.

소수더라도 점점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이름은 오래 불리게 되어 있다. 이름의 크기가 빠르게 커져 버리면 그만큼 이름 값에 사람들이 바라보는 기대치가 커지게 마련이다. 그런 고통속에 사는 이 차라리 나는 무명을 택하고 싶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불리는 이름을 갖고 싶은가? 나는 아니다.

나는 문학을 아주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 언어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내가 선택하여 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글과 내가 매일 홀로 깊은 밤 앉아 쓰는 일기는 전혀 다른 언어를 갖고 있다. 나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기에 자유롭고 솔직하게 글을 쓸 수 있다. 내게서 언어를 꺼내는 건 더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사십 팔년이란 시간동안 마음이 이야기하지 못했던 참았던 말들을 글을 통해 내뱉고 있을 뿐이다.

늙어가며 하나 꿈이 있다면 마음의 글이나 쓰면서 조용히 늙어가는 것이다. 아주 고요한 곳에서 말이다. 아무 걱정없이 말이다. 이왕이면 곱게 늙어가고 싶다.



시간속에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이 늦을수록 효용의 크기가 점진적으로 커지게 되어 있다.

이것은 광고에도 활용되기도 한다. 은근히 퍼지는 이름. 브랜드. 천천히 다가오는 이름이 있다. 사회 나와 배워온 것이 내게는 이런 것이다. 내 주변에는 이름을 널리 퍼트리고 싶어하는 젊은 친구들이 즐비하다. 나는 아무말 하지 않는다. 그들의 꿈을 향해 가는 중에 참견 할 생각이 없다. 충고도 할 생각도 없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때, 우리는 이름을 빌려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그렇게 허명은 개인의 결핍 위에 세워진 사회적 장치가 된다.



허명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자란다.

혼자 있을 때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한다. 누군가가 봐주고, 평가하고, 비교할 때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그래서 허명은 고독을 싫어한다.

박수와 숫자와 반응을 먹고 자란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허명은 ‘타자의 시선이 내 자아를 대신 정의해주는 상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묻기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통해 나를 확인한다. 그 순간 자아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거주하게 된다.



문학적으로 허명은 늘 과장된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지나치게 단정하거나, 지나치게 당당하거나, 지나치게 바쁘다. 멈추면 들릴까 봐, 조용해지면 들켜버릴까 봐 스스로를 계속 움직인다.



허명은 쉼을 두려워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이름 뒤에 남은 공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명은 끊임없이 다음 목표를 부른다. 다음 성취, 다음 인정, 다음 호칭. 도달하는 순간보다 도달 직전이 더 중요해진다.



심리적으로 허명은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충분하다는 감각을 내면에서 얻지 못한 사람일수록, 바깥의 증거에 의존한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 가치의 유일한 근거가 될 때 허명이 된다. 이때 사람은 점점 자신을 연출하게 된다. 감정마저 관리 대상이 되고, 슬픔도 성취처럼 포장된다. 진짜 마음은 점점 뒤로 물러나고, 보여주기 좋은 마음만이 전면에 선다.



허명은 종종 성실함과 혼동된다.

열심히 사는 모습,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미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동력이 어디서 오는지를 들여다보면 결이 달라진다. 삶을 더 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뒤처질까 봐, 잊힐까 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움직이고 있다면 그 노력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허명은 성취를 통해 자존을 쌓는 대신, 자존의 부재를 성취로 가린다.



철학적으로 허명은 존재론적 불안을 외주화한 상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할 때, 우리는 타인의 반응으로 대신 답을 얻는다. 좋아요의 개수, 직함, 성과, 호칭, 평판. 그것들은 임시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하지만 임시적인 정의는 늘 갱신을 요구한다. 그래서 허명에 기대 사는 삶은 쉼이 없다. 멈추는 순간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문학 속 허명은 종종 비극으로 귀결된다.

인물은 자신이 쫓던 것이 실은 자신을 비워내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러나 현실의 허명은 그렇게 극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더 조용하고, 더 일상적이다. 그저 피곤함으로 나타나고, 이유 없는 공허로 스며들고, 성취 뒤의 허탈감으로 남는다. 성공했는데 기쁘지 않고, 인정받았는데 외롭다. 허명이 남긴 감정은 늘 모순적이다.



허명은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사회를 작동시키는 연료이기도 하다. 문제는 허명이 삶의 중심이 될 때다. 중심이 바깥에 있을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과 멀어진다. 스스로의 리듬, 취향, 감정의 진폭을 잃어버린다. 대신 타인의 속도에 맞춰 호흡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질문이 떠오른다. “이 모든 걸 멈추면 나는 누구지?” 중독같은 것이다.



허명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갑자기 욕망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을 바꾸는 일에 가깝다. 보여지는 나에서 느껴지는 나로, 평가받는 나에서 살아 있는 나로 시선을 옮기는 일. 아주 사소한 감각을 다시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기쁨, 성과와 무관한 만족,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들. 그런 순간들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허명은 결국 소리의 문제다.

너무 큰 소리에 익숙해져, 자기 안의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상태. 그래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조용해질 필요가 있다. 박수 없는 공간, 평가 없는 시간, 이름이 불리지 않는 자리에서 비로소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성공을 말하지도, 비교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렇게 묻는다. 지금의 삶이 정말 네 것인지.



허명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보이고 싶은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그 느린 자리에서, 허명이 아닌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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