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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어가다

한 해의 가장 낮은 빛에서 건져 올린 마음

by 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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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시간은 유독 색을 띤다.

평소에는 투명하던 하루들이, 이맘때만 되면 물감을 풀어놓은 듯 서서히 스며들어 물들어 간다. 차가운 공기 속에는 묘한 온기가 있고, 해가 지는 속도마저 의미심장해진다. 우리는 그저 하루를 살아냈을 뿐인데, 연말은 그 하루들을 한 해라는 이름으로 묶어 우리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마치 “이만큼을 살았다”라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해가 지나간다는 사실은 늘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온다.

잘 살아냈다는 안도와, 충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는 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그때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날 왜 조금 더 용기 내지 못했을까. 연말의 생각들은 대개 과거형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감정이 숨 쉬고 있다.



시간은 참 공평하면서도 불공평하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만, 누구에게나 다르게 남는다. 어떤 날은 한 장의 사진처럼 또렷이 기억되고, 어떤 날은 있었는지조차 희미해진다. 우리는 기억할 수 있는 것들로만 자신을 설명하려 하지만, 사실 우리를 이루는 대부분은 잊힌 날들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 평범한 하루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를 만든다.



편안하게 쉬는 날. 연말의 명동 거리에는 사람들의 걸음이 묘하게 바빠 보인다.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고, 얼굴에는 마스크 너머의 표정이 숨어 있다. 그들은 어쩌면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해를 정리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더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기 위해서. 불필요한 감정과 후회를 정리하고, 새해라는 빈 서랍을 마련하기 위해. 나 역시 그 사람들 속에 흡수되어 무리가 되었다.



철학은 늘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연말의 질문들은 유독 조용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이 방향으로 가도 되는가”, “내가 믿어온 것들은 여전히 유효한가”.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과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 시기가 되어서야 조금 이해하게 된다. 쉬는 날이면 들리는 작은 책방과 큰 책방은 건너 뛰기로 했다. 내 손에도 작은 쇼핑백 하나쯤 걸려 있다면, 지금 걷는 거리에 풍경과 아주 잘 물들 수 있을거 같아서였다.



나는 성탄절이나 연말에 아무런 감흥이 없어진 것이 사실이다.

주로 빨간색으로 칠해진 날은 직업상 정신없이 일을 하기에 바쁘고, 사람들이 즐긴 자리가 지나가야 나의 자리가 찾아온다.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또 다른 하루의 연장처럼 찾아왔다. 하지만 연말은 다른 사람들처럼 색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나는 생일도 조용히 지나가는 하루로 만들어 버린 지 오래다.

정확히 언제 부터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조용히 지나가는 날로 선택했다. 숫자와 기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차라리 그런 날이면 혼자 좋아하는 곳을 돌아다니며, 거리에 물들어 가는 것들을 편안하게 보고 느껴보는 것이 편했다. 사람과 풍경. 그리고 사람이 별로 없는 카페에 앉아 이것저것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한 해가 끝난다는 것은,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으로 접혀 들어와 기억이 되고, 감각이 되고, 태도가 된다. 실패는 실패로 남지 않고, 상처는 상처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음 계절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미묘하게 바꾼다.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다정하게. 그래서 연말은 슬픔보다는 성찰에 가깝다. 끝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지점이다.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걸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뒤를 본다. 그리고 그 확인은, 내일을 살아갈 최소한의 용기가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날, 우리는 또다시 시간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또 한 해가 지나가며 수많은 이야기들로 육체와 정신을 물들였다. 여전히 완벽하지 않고, 여전히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것만으로도, 이 한 해는 실패가 아니다.



연말의 빛은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은은하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빛이면 충분하다. 여전히 물들어 가는 시간에 담기는 것들을 잘 주워놓고 가고 싶을 뿐이다. 시간 속에 달라져 가는 나 역시 곱게 물들어 가길 바라본다. 내가 한 때 알았던, 내가 현재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깊고 고운 물이 드는 연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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