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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사가 된 이유

입은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다른 곳에 있었다

by 구시안


나는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입은 움직였으나 목소리는 늘 한 박자 늦었고, 감정은 직접 나오지 못한 채 다른 형식을 빌려 세상에 도착했다. 그래서 나는 복화술사가 되었다. 인형을 통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대신해 말해 줄 무언가를 필요로 했던 사람으로서.



복화술은 기묘한 기술이다.

말은 분명 여기서 나오는데, 사람들은 저쪽을 본다. 화자는 존재하지만, 책임은 분산된다. 이 구조는 오래전부터 내 삶의 방식과 닮아 있었다. 직접 말하면 과해질 것 같았고, 직접 말하면 관계가 흔들릴 것 같았으며, 직접 말하면 “왜 그렇게 느끼느냐”는 질문을 감당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닫고 감정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배치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재능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심리적으로 복화술사는 감정을 외주화 한 사람이다.

상처를 직접 말하지 않고, 농담으로 말하고, 비유로 말하고, 타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 “내 얘기는 아니고....”라는 문장은 사실상 가장 개인적인 고백의 시작이다. 복화술사는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들킬 때의 위험을 너무 일찍 배운 사람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분위기를 읽는 데 능숙했다.

가난이 주는 것은 허기짐만은 아니었다. 누가 불편해질지, 어느 말에서 표정이 굳는지, 어떤 감정은 환영받고 어떤 감정은 문제를 일으키는지. 그래서 말하기 전에 이미 수십 번의 검열을 거쳤다. 감정은 날것으로 나오지 못했고, 항상 ‘안전한 포장’을 필요로 했다. 복화술은 그 포장의 가장 정교한 형태였다.



복화술사는 자기 동일성을 유예한 존재다.

“이 말은 내가 한 말이지만, 전부 내 말은 아니다.” 책임과 진심 사이의 이 미묘한 간격.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거리다. 우리는 종종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하지만, 동시에 진실이 불러올 불편함은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그 모순 속에서 복화술사는 탄생한다.



문학 속 화자들이 종종 가면을 쓰는 이유도 같다. 나는 작가들도 복화술사라고 생각한다.

직접 말하면 너무 적나라해질 때, 인물은 등장하고, 화자는 물러난다. 나는 늘 인물 뒤에 숨어 있었다. “사람들이 보통 그렇잖아.” “어떤 경우엔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지.” 이 문장들 속에서 나는 나를 지웠고, 동시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냈다. 복화술은 숨김이 아니라 우회였다.



그러나 복화술사의 피로는 조용히 쌓인다.

누구도 정확히 나를 겨냥해 이해하지 않는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끄덕임은 인형을 향한다. 공감은 있지만, 도달은 없다. 그렇게 말은 남는데, 관계는 비어 간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왜 나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복화술은 진심을 보호하지만, 친밀함은 보호하지 못한다. 친밀함은 위험을 동반한다. 오해받을 가능성, 상처받을 가능성, 관계가 변할 가능성. 복화술사는 그 가능성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그 대가로 관계의 깊이도 함께 줄어든다. 나는 시간 속에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복화술사를 쉽게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나를 살게 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직설을 견디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날것의 감정을 환영하는 것도 아니다. 복화술은 폭력적인 환경에서 감정을 지키는 지능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니 이것을 고쳐야 할 결함으로만 부를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제 조금 다른 선택지를 연습하고 있다.

모든 말에서 복화술사가 되지 않기로. 어떤 관계에서는 인형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직접 내보내기로. 떨리더라도, 문장이 어색하더라도, 책임이 온전히 나에게 돌아오더라도. 이것은 용기의 문제라기보다 환경을 가르는 문제다. 어디에서까지 복화술사가 필요하고, 어디에서는 필요 없는지 구분하는 일.



어린 시절의 그 다락방에는 작은 심장을 갖은 아이가 있었다.

작은 누나의 손을 잡고 잠들던 차가운 기운만이 감도는 다락방엔, 들어왔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전기장판 하나가 놓여있었다. 작은 불을 밝히고 읽는 동화 속 모든 것은 이해되지 않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 시절의 잔혹동화를 떠올려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좀처럼 마르지 않던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장미가 그려진 밍크이불은 혹독한 추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작은 것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큰 소리에는 주눅들던 시절이었다. 큼지막한 크기의 칸들로 이루어진 그림 일기장에는 칸을 꽉 채울 만큼의 크기의 글자들이 적혀 내려갔다.



복화술사가 된 이유는 하나였다. 안전. 현재 복화술사를 내려놓는 이유도 하나다. 관계.

말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나온다. 나는 아직도 비유를 사랑하고, 간접화를 즐기며, 여백을 남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인형이 아니라 내가 직접 불려야 할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 불리지 않으면, 아무리 정교한 기술도 결국 고독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쩌면 성숙이란, 복화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자리에서까지 쓰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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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8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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