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거리에서 그리운 존재를 만나게 될 때
일본의 어느 조용한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발끝부터 스며들었다.
회색 바닥 위를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 다른 일본인처럼 과하게 꾸미지 않은 운동화와 검은 바지, 그리고 프레임 한쪽을 스치며 지나가는 작은 강아지의 다리. 얼굴도, 목적지도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다이칸야마의 거리는 늘 이렇게 말수가 적다.
크지 않은 소음, 절제된 색, 그리고 불필요한 설명이 없는 풍경. 그래서 오히려 걷는 사람의 마음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일본을 자주 갔던 이유는 거의 일 때문이었다.
디자이너 시절에는 시장조사로. 브랜드를 내고는 일을 핑계삼아서. 휴가 때는 애써 이유를 달아 도쿄에 살고 있는 친구를 보러 갔다. 더 솔직하게는 도쿄의 거리를 걷는게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다 답답하거나 잠시 숨을 쉴 곳이 필요하면 나는 도쿄로 떠나고는 했다.
사진을 좋아한다. 카메라 하나를 들고 돌아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문득 이 사진을 꺼내 보니 생각나는 도쿄의 거리가 떠올랐다. 다이칸야마의 거리에 걸렸던 무지개 다리가 생각나던 하루였다. 내가 걷는 거리가 낯선 곳이나 새로운 곳이라도 그리운 존재를 만나게 되는 일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기억이라는 것은 잔인하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것처럼. 어느 여행길에 만나게 되는 그리움이라는 것이 조용히 물들 때가 있다.
아침 출근길의 분주함도, 관광객의 들뜬 속도도 아니었다.
시끄러운 시부야나 하라주쿠 오모테산도의 거리도 아니었다. 도쿄의 가장 좋아하는 곳 다이칸야마.
마치 이 동네에 현지인처럼 다녔다. 이미 익숙한 길. 작은 골목길. 좋아하는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아마도 하루의 중간쯤, 혹은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간일 것이었다.
도쿄의 거리에서는 ‘어디로 가는가’보다 ‘어떻게 걷고 있는가’가 더 중요했다.
목적이 흐릿해질수록 감각은 선명해지고, 발바닥에 전해지는 아스팔트의 차가운 온도, 옆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함께 걷는 존재의 체온이 또렷해진다. 그렇게 누군가가 자신의 반려견을 대리고 걷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문득, 낯선 곳에서도 그리운 존재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아지는 주인의 옆이나 앞이 아니라, 살짝 비껴서 있었다.
완전히 이끌지도, 완전히 뒤따르지도 않는 거리. 주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배려하듯 아장아장 걷는 강아지는 이뻤다.
일본 특유의 관계 감각이 떠오른다.
지나치게 다가가지 않지만, 결코 혼자 두지 않는 태도. 사람과 사람 사이 느껴지는 적당한 배려, 사람과 도시 사이에도 늘 이런 간격이 존재한다. 그래서 일본의 거리는 외롭다기보다 조용하고, 차갑다기보다 단정하다.
흑백의 톤은 감정을 덜어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오히려 감정을 농축한다.
색이 없기에 우리는 형태와 리듬에 집중하게 된다. 바지의 주름, 운동화의 곡선, 강아지의 뽀글뽀글한 털이 흔들리는 방향. 이런 사소한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문장이 된다. “오늘은 그냥 걷고 있다”라는, 아주 담백한 문장.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일본 거리에서 혼자 걷던 기억들이 겹쳐진다.
말은 적었지만 생각은 많았던 시간들. 편의점 불빛 아래서 멈춰 서 있던 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느꼈던 이상한 안도감.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순간들 말이다.
사람이라 생각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생각들을 하고 살아간다. 가을같은 날씨에 겨울을 맞이하는 도쿄의 거리에는 생각들로 물들어 있었다. 스스로를 달래주던 시절. 자책하고 최책감에 시달리며 그 고조를 달리던 계절에 걷게 된 다이칸야마의 거리에 수놓아져 있는 것은 침묵속에 위로였다.
무지개 다리를 건넌 친구를 생각하며 걷는 거리는 그리움으로 금세 물들어 버렸다.
누군가의 반려견을 보고도 떠오르는 것은 아직 마음속에 살아 뛰어 놀고 있는 나의 반려견이었다. \
내가 다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결심이라기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의 상태에 가깝다. 그 아이가 떠난 뒤로도 시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갔다. 계절은 바뀌었고, 거리에는 여전히 산책하는 사람들과 반려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 하루 어딘가에는 늘 비어 있는 한 칸이 남아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부르던 이름, 현관 앞에서 들리던 발소리, 아무 말 없이 곁에 와 몸을 기대던 온기. 그런 것들은 사라졌는데, 몸은 아직 그 리듬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다시 키우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기쁨을 주고, 다시 웃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기쁨은 이전의 것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생명이 떠나고 난 후 대체하기 보다는 마음속에서 살아 숨쉬게 고히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남은 인생동안 생명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다.
그 친구가 떠난 이후 나의 공간에는 생명을 들이지 않았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말은 참 아름답고 다정하다.
끝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것 같고, 고통보다는 기다림에 가깝게 느껴지게 한다. 그래서 더 아프다. 정말로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아직 너무 쉽게 다음을 선택할 수 없다. 마치 그 아이와의 시간을 서둘러 정리해 버리는 것 같아서.
함께 살았던 시간은 짧지 않았지만, 충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충분히 안아주지 못한 날들, 귀찮다는 이유로 산책을 미뤘던 순간들, 바쁘다는 핑계로 눈을 맞추지 못했던 저녁들. 그런 기억들이 남아 있다. 사랑했지만 완벽하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 아직 나를 붙잡고 있다.
다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이유는, 그 아이를 너무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랑은 종종 다음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어떤 사랑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게 한다.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사진을 보면 웃다가도, 문득 울컥해지고, 비슷한 발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돌리게 되는 그 자리는 내가 걷는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되고는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별을 이미 한 번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무너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언젠가 다시 같은 아픔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나는 아직 그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음으로써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
비워 둔 자리를 억지로 채우지 않고, 그 빈 공간이 남아 있도록 두는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미련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존중에 가깝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마음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나는 결정한 것을 바꾸지 않는 심장을 갖고 있다. 다른 생명을 맞이하고, 또 다른 이름을 부르며, 또 다른 생명을 통해 그 아픔을 치유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더 오래 바라보게 되는 사진이 있다.
삶의 대부분은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일본의 거리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냥 걷고, 그냥 마음속에 함께 있고, 그냥 하루를 통과한다.
그 담담함 속에서 숨을 고르는 것이다.
누군가를 추억하면서. 혹은 내 자신을 생각하면서. 잊혀진 것을 회상하면서. 바래진 것들을 기억하면서.
걷고 싶은 대로 걷고 있는 내 발에 마음을 맞기는 것이다.
이 사진이 주는 감성은 여행의 기억이 아니라 추억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반려견 한 마리가 드리운 도쿄에 걸린 무지개 다리를 타고 내려와 다시 마음속에 들어온 나의 반려견과 한참을 걷고 있었다.
잠시 머무는 풍경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장면속에서. 그래서 더 진짜 같고, 그래서 더 마음에 남는다.
일본 거리의 감성은 이렇게 조용히 다가와, 아무 말 없이 내 안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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