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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핀 작약을 밟고 지나간 밤

잠든 사이에 결정된 것들

by 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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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나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작약꽃을 밟고 지나갔다.

놀라울 만큼 선명한 장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죄책감은 없었다. 발아래가 너무 붉어서, 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작약은 원래 그런 식으로 피어난다.
아름다움이 지나치게 많아 경계가 흐려진 채, 스스로를 바닥까지 낮추며. 꿈속의 꽃들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밟히는 순간마다 어둠이 조금씩 향기로 갈라졌다.



그 밤의 언어는 낮과 달랐다.

설명하지 않았고, 용서받으려 들지도 않았다. 단어들은 검은 물에 적신 잉크처럼 번지며 나타났고, 문장은 의미보다 먼저 맥박을 가졌다.



나는 꿈에서 내가 아닌 발을 신고 있었다.
젊은 시의 오만, 말이 되지 못한 예언, 버려진 문장들의 뼈 같은 것들이 발뒤꿈치에 붙어 있었다. 밤은 사물에게 자기 이름을 돌려주는 시간이라고 누군가가 속삭였다. 작약꽃 밭에 모여 앉아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싫어 뒤로 드리워진 검은 숲을 향해 걸었다.



의식이 벗겨지고 세계가 스스로를 발음하는 순간이라고 그림자가 되뇌어 주었다.

그래서 꿈속의 작약은 꽃이 아니라 문장이었다. 과도하게 피어난 비유, 아름다움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땅으로 쏟아진 이미지. 나는 그것을 밟고 지나가며 죄책감보다 이상한 해방을 느꼈다.



시는 언제나 무언가를 훼손하면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검은 숲이 이야기했다.

밤은 잔인하지만 정직하다고. 낮에 숨긴 욕망, 미뤄둔 목소리, 끝내 쓰지 못한 문장들을 한꺼번에 호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한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말하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꿈은 예언이 아니라 압력이다.

안에서 두드리는 검은손. 잠든 사이 언어를 밀어 올리는 힘. 작약을 밟고 지나온 뒤 발바닥에 남은 것은

꽃잎이 아니라 붉은 문장 하나였다.



아직 쓰이지 않았지만 이미 나를 물들인 문장.

이 밤이 끝나면 다시 조심스러운 문체로 돌아가겠지만, 어딘가에는 이렇게 과도하고 위험한 언어가 계속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작약은 꽃이 아니라 마음 같았다.
정리하지 못한 감정, 너무 예뻐서 방치해둔 슬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기억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피어
길을 막고 있었다. 밟고 지나가며 나는 그것들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도 발바닥에 남아 있었다. 꽃잎 대신 어떤 감각처럼.



꿈은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흐드러지게 알려준다.

눈을 뜨고 뒤돌아선 순간. 바라본 작약꽃밭은 모두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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